[북리뷰]1913세기의 여름-전쟁 징조 속 유럽의 지성과 감성

<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한경희 옮김
문학동네·1만8000원

여름은 역사의 화약고와 같다. 우리 역사나 세계사를 돌아보면 온도계가 올라갈 때 전쟁은 빈발했다. 6·25나 제1차 세계대전이 그러하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사람을 죽인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무더위는 집단이나 국가의 광기를 빚어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여름을 거쳐야만 과육은 여무는 법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유럽은 문학, 회화, 건축, 디자인 등 무수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백화제방(百花齊放)을 보여준다. 독일의 문화사가인 플로리안 일리스는 <1913년 세기의 여름>이라는 책에서 전쟁에 대한 예감과 공포 속에서도 역동과 활력이 넘치는 예술가와 지식인을 낱낱이 그려낸다.

당시 호전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불길한 징조를 느낀 감수성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푸른 말’로 유명한 화가 프란츠 마르크는 성난 야수를 담은 ‘늑대들’이라는 섬뜩한 작품을 그렸다. 역사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을 쓰면서 모든 것이 종말을 향해가고 있다는 두려움을 표출했다.

저자는 100년 전 유럽 문화의 본질을 구현한 도시로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꼽는다. 모든 길은 빈으로 통하고 빈에서 나왔다. 파리, 베를린, 런던의 유명인사도 빈에서는 ‘톰’과 ‘제인’이었다. 정신분석학의 프로이트, 그림의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 현대음악의 아버지 쇤베르크, 건축가인 아돌프 로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괴물도 있었다. 24세의 젊은이 히틀러는 수채화를 그리다가도 정치토론만 벌어지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스캔들도 허다했다. 프로이트 박사는 ‘샤일록’의 정신을 살려서 친구인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가 죽은 뒤 유족에게 함께 산책한 시간도 진료비로 청구했다. 수제자로 생각했던 칼 융과는 모든 인간관계를 청산하자는 절교장을 주고받았다. 숫자에 대한 징크스에 시달린 쇤베르크는 13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1913년을 맞아 공포를 느낀 그의 불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그해 봄 연주회에서 지휘자로 나선 쇤베르크에게 청중은 야유를 퍼붓고 심지어 한 사람은 무대에서 따귀까지 때렸다.

천재들이 인정하는 천재인 비트겐슈타인도 대학생이던 이 해 여름방학에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의 하나인 <논리철학논고>를 쓴다. 나중에 이 책을 박사논문으로 심사하던 원로 교수들이 횡설수설하자, 그는 오히려 심사위원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심심한 위로를 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해에 빈에는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와 스탈린도 잠시 같이 있었다. 생활고에 짓눌렸던 트로츠키는 하루종일 카페에서 체스를 두면서 빈의 ‘타짜’가 됐다고 한다. 스탈린은 하숙집의 보모를 유혹하려다 실패하고 동지인 부하린이 성공한다. 나중에 스탈린은 부하린을 스파이 혐의로 처형했다. 믿거나 말거나 질투의 씨앗이 이때 심어진 것은 아닐까.

북리뷰

공교롭게도 전쟁의 예감에 사로잡힌 유럽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혁명가들은 가장 뜨겁고 열정적인 여름을 보내면서 현대의 서구문화를 잉태했다. 전전(戰前)의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