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개혁,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한은 총재, 국감서 “공감”… 한은 “절대 아님” 긴급 해명

“리디노미네이션의 추진 의사를 표명한 것은 절대 아님.” 지난 9월 17일 한국은행에 대한 국감이 한창 진행될 때 한은은 긴급보도 해명자료를 냈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이날 국감에서 “화폐개혁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발언을 한 직후였다. ‘절대’라는 표현을 넣을 정도로 한은은 절박했다. 화폐개혁을 의미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이 미칠 여파가 그만큼 컸다는 의미다.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란 디노미네이션을 다시 한다는 뜻이다. 디노미네이션은 돈의 액면가를 뜻한다. 그러니까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액면가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화폐 액면가를 바꿀 때는 교환비율을 손댈 수도 있고, 아예 단위를 손댈 수도 있다. 1000원을 1원으로 하거나, 1환으로 바꾸는 식이다. 쉽게 말하면 화폐개혁이다. 일반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은 액면가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화폐단위를 낮추는 화폐개혁으로 인식된다.

화폐개혁을 단행할 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할 때, 경제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 돈의 가치가 너무 떨어져 정상적으로 쓰기 힘들 경우에 한다. 혹은 지하에 숨은 자금을 양지로 끄집어낼 때도 필요하다. 어떤 식이든 기존 통화질서를 유지하기 힘들 때 화폐개혁이 단행된다. 유럽연합(EU)이 탄생하면서 유로존 국가들이 유로화를 쓰기로 한 것도 화폐개혁이다.

현 시점에서 한국에서는 원화를 사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인플레이션도 없고, 정치질서가 불안정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리디노미네이션 얘기가 나오는 것은 왜일까? 새누리당 류성걸 의원이 지난 9월 17일 국감에서 이 총재에게 질의한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류 의원은 “우리 경제규모에 비해서 (화폐) 숫자 크기가 너무 크다는 논의가 있다”고 말했다.

경북 경산시 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 직원들이 새로 발행되는 5만원권을 점검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제 규모에 비해 화폐 숫자 너무 커져
10월 2일 현재 1달러는 1181원이다. 1유로는 1320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달러나 유로화에 대해 네 자리 숫자까지 쓰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경제규모가 커져 해외와 거래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통화 단위가 커서는 곤란하다. 교환하기도 불편하고 이를 표현하는 데도 제약이 생긴다. 이미 한국은 ‘경’ 단위까지 쓰고 있다.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2013년 말 기준 전체 자산에서 빚을 뺀 국민순자산은 1경1039조2000억원으로 집계됐다. 1경은 10,000,000,000,000,000원이다. 0만 16개다. 조 단위 매출액이 속속 나오는 상황에서 이렇게 단위가 커서는 기업도 국민도 불편할 수 있다.

1962년 마지막 화폐개혁을 한 지 50년이 지나는 동안 물가도 대폭 상승했다. 그러니 리디노미네이션을 해 숫자를 좀 줄여보자는 것이다. 1000대 1로만 바꿀 수 있어도 0을 3개는 떼낸다. 5000원짜리 짜장면은 5원이 되는 셈이다. 이미 일부 음료전문점에는 4500원을 4.5로 5000원을 5.5로 표현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리디노미네이션은 세 번 단행했다. 첫 번째가 1950년 한국전쟁 때다. 북한군에게 서울을 빼앗긴 뒤 한국은행 본점이 탈취당하자 정부는 그동안 사용하던 조선은행권 사용을 금지했다. 북한군이 한은 본점에서 탈취한 돈을 마구 뿌려 경제를 교란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한국은행권만 통용되도록 했다. 당시 교환비율은 1대 1이었다. 조선은행권 100원을 가져오면 한국은행권 100원으로 바꿔주는 식이었다. 액면가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리디노미네이션과는 거리가 멀다. 전통적인 의미로 축소하면 두 번 있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53년 2월 15일 정부는 ‘대통령 긴급명령 제13호’를 통해 100원을 1환으로 바꿔주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전시에 풀린 돈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조치였다. 9년 뒤인 1962년 6월 10일 두 번째 리디노미네이션이 단행된다. 정부는 ‘긴급통화조치법’을 통해 10환을 1원으로 바꿔주는 통화개혁을 했다. 1960년대 초기 정치 불안으로 인해 극심했던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고 지하에 숨은 자금을 끌어내 경제개발계획에 투입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경제계 혼란 우려 공론화는 어려울 듯
잠잠하던 리디노미네이션이 다시 부각된 것은 2002년이었다. 한국은행은 “통화단위가 너무 커졌다”며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했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 폭등 등으로 물가가 치솟으면서 노무현 정부는 리디노미네이션을 포기했다. 당시 한은 내부에서는 1000원을 1환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리디노미네이션 논란은 11년 만에 다시 제기된 셈이다.

기획재정부의 입장은 완고하다. 웬 뜬금없는 화페개혁이냐는 것이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9월 18일 기자들과 만나 “현 정부 내에서는 (리디노미네이션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확실히 선을 그었다.

정부가 리디노미네이션에 신중한 것은 통화를 건드리는 것은 그만큼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과 가계 등 모든 경제주체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시달리게 된다. 통화 교체에 따른 비용도 크다. 정부는 새로 돈을 찍어야 하고, 기업은 회계를 바꿔야 한다. 은행도 시스템 교체에 들어가는 돈이 상당하다. 의도치 못한 물가인상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예컨대 900원을 1000대 1로 리디노미네이션하면 0.9원이 된다. 판매자 입장에서는 1원으로 올릴 유인이 생기게 된다. 그만큼 사전 준비가 충실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정말로 화폐개혁을 할 생각이 있다면 정권 초기에 했지 지금 말을 꺼내겠느냐”며 “정권교체기에 화폐개혁이 이뤄지면 혼란을 책임질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1960년 이후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나라는 한국을 비롯해 30여개국에 60차례가 넘는다. 지난 10년으로 한정해도 2005년 이후 10개국이 단행했다. 화폐개혁의 성패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터키다. 터키는 2005년 1월부터 기존 화폐를 100만분의 1로 낮췄다. 화폐 명칭도 리라에서 신리라로 바꿨다. 이 결과 매년 50%에 달하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한 자릿수로 묶는 데 성공했다. 짐바브웨는 실패 사례다. 짐바브웨는 2006년 8월 기존 화폐를 1000분의 1로 낮췄다. 하지만 연 2000만%에 달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잡히지 않았다. 2008년 8월 100억대 1로 단위를 또다시 떨어뜨렸으나 효과는 없었다. 2009년 2월 ‘1조대 1’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1조대 1로 기존화폐 단위를 떨어뜨린 것은 통화 역사 이래 처음이다. 1조원이 1원이 됐다는 의미다.

북한도 화폐개혁 실패 사례다. 2009년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바꿨지만 물가만 폭등했다. 화폐개혁을 주도했던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은 공개총살됐다.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해 한은을 비롯, 통화전문가들에게서는 찬성이 많지만, 실물경제 전문가들에게서는 반대가 많다. 김성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가계부채나 한국 경제의 구조개혁 등 틀을 바꿔야 하는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우선순위로 공론화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