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스토리텔링-걸어본다 홍대]주인의 손길이 묻어나는 아기자기한 점포들

예술가들의 일터이자 공터이고 쉼터인 ‘홍대’라는 그 언저리를 이참에 두루 살펴보자 하여 매일같이 걸어보고, 매일같이 보아보며 새롭게 ‘발견하는 이야기’를 펼쳐나갈 예정입니다. 걸을 수 없게 된 사람도 있고 볼 수 없게 된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걷지 않을 수 없고 보지 않을 수 없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점점 걷는 데만 익숙해지고 보는 데만 열중하게 된 건 아닐까요. 아마도 걷는다는 건 몸을 미는 일이고, 본다는 건 마음을 미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온몸을 발산해야만 하는 ‘걸어본다’ 시리즈의 취지 속 ‘홍대’를 테마로 한 이 글들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만만했던 ‘홍대’를 만만치 않게 다시 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그 첫 회로는 성동혁 시인이 나섰습니다. 앞으로 13주 동안 13명의 문인들이 홍대를 어슬렁거려 줄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이곳에 갈 땐 예의를 차리고 가자. 구색이 어떻더라도 적어도 신사가 될 준비를 하고 가자.

내 마지막 액세서리-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372-29 2층
시계에 욕심이 없었어요. 그럴싸한 시계는 등단 때 누나에게 선물받았던 시계가 전부였죠. 그때는 스물일곱 살이었고, 저는 시계보다 다른 것들이 더 좋고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시계를 자주 보는 시기가 찾아왔어요. 병원 생활을 오래 하며 병실 침대에 누워 시계만 볼 수밖에 없는 시기를 보냈어요. 그때 전 시계와 친해졌어요.

병원에서 환자복 말고 걸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계뿐이에요. 그곳에선 귀걸이도 반지도 모두 빼놓아야 해요. 그저 시계만 차고 누워 있었죠. 누워서 시간을 보고 있으면 슬픈 마음이 들었어요. 정적 속에서 시계를 보며 아 이곳은 정지한 곳이 아니구나 깨달았어요.

제가 느낀 건 시계는 피부 같아야 한다는 거예요. 시계는 아무리 값비싸더라도 팔목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부담스러운 금속이 되는, 꼭 주인과 한 몸으로 있어야 하는 액세서리예요. 요즘의 시계는 중국이나 프랑스, 이탈리아제뿐이죠. 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OEM 방식이거나 브랜드의 로고로 돈을 자랑하는 명품뿐이죠. 심지어 명품들도 이제 중국에서 만들어지죠.

자신만의 첫 시계를 고르는 일은 중요해요. 그 시계로 앞으로의 시간을 내다볼 것이니까요. 분명 20대는 그런 시기죠. 전 젊은 친구들이 자신을 위해 한 가지 사치를 해야 한다면 희귀하지만 쉽게 변치 않는 시계를 하나 장만하길 원해요.

해버데셔스. 이 상점은 상수의 외딴 골목 2층에 덩그러니 있는 편집숍이에요. 남성 양장점 주인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 상점 이름처럼 이곳엔 타이와 베스트, 수트를 정갈하게 입은 주인이 있어요. 더운 여름에도 수트를 걸치고 있는 그런 근사한 주인요.

오래된 당구대에 근사한 시계와 가죽가방들이 놓여 있구요. 면도기와 셰이빙 폼, 포마드까지 놓여 있는 이곳은 근사한 남성이 될 준비를 한 청년들을 기다리는 곳이에요.

이 동네는 너무 어려졌죠. 많은 학생들이 밀려들어 오며 전통과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대신 밀려났어요. 그곳에 나무 간판을 걸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상점이 있어요. 생애 처음 근사한 시계를 사려는 어린 친구들에게 저는 작은 조언을 하고 싶어요.

사람 손이 느껴지는 시계를 살 것. 손과 가장 가까운 팔목, 그곳은 손의 다른 말이 아니죠. 손목에 거추장스러운 명품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뿐인 시계를 차길 바라요. 유행을 넘어서는 것은 자신의 몸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드는 일뿐이에요. 20대의 수많은 친구들이 시계를 만든 사람의 손을 느끼고 대로변을 빠져나와 골목 구석구석을 누리길 바라요. 좋은 시계는 커다란 대로변이 아니에요. 골목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몇 년 후에도 카페 안에서 조용히 콩을 볶는 바리스타의 로스터인 거죠.

유행은 대로변으로 거칠게 질주하지만 영혼이 있는 것들은 절대 서두르지 않아요. 20대의 끓었던 호흡을 어느 순간 차분히 정리하고 싶다면, 초침에서 분침으로 한 발자국 어른이 될 친구들은 이곳을 들러 보세요.

시계 제조가 사라진 영국에서 여전히 시계를 만들고 있는 디자이너, 프랑스에서 여전히 시계를 만드는 장인, 스웨덴의 단정하고 조용한 눈밭을 상상할 수 있는 근사한 시계들이 있을 거예요. 이곳은 너무 빠르고 쉽게 바뀌고 있어요. 이제 우리, 우리가 어느 시간을 걷는지, 어떤 곳을 걷고 있는지 잊지 말아요.

유월 십팔일 목요일, 오후 다섯 시 칠 분. 사람들이 서서히 늘고 있는 상수에서 전해요. 제 시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죠.

이곳에도 맨해튼은 있다.

맨해튼-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407-20 지층
제게도 맨해튼은 있어요. 이번에도 의사는 출국이 안 된다는 이야기뿐이었지만 그래도 제게는 맨해튼이 있어요. 이제 타국에서의 시간은 불가능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제게는 맨해튼이 있어요. 불가능한 삶을 가능케 하며 살고 있는 제게 맨해튼은 있을 거예요. 늘 거짓말처럼 무엇을 해내는 것처럼 전 맨해튼을 걸을 거예요. 허깨비 같은 영혼이 훌훌 그곳을 걷는 게 아니라 분명 이 두 발로 맨해튼을 걸을 거예요.

그곳엔 커다란 서점이 있을 거구요. 어떠한 작가들은 낭독을 하겠죠. 일요일엔 시장이 크게 열리고 바닥 가득 분필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그곳엔 커다란 서점이 있을 거구요. 초콜릿 카페에선 초콜릿 피자를 팔 거구요. 지금은 아마 그곳의 날씨가 가장 좋을 시절이겠죠. 흰 신발을 신고 발을 맞춰 걷는 사람을 상상해요. 제게도 맨해튼은 있어요. 맨해튼을 하얗게 걷는 꿈을 꿔요. 난 맨해튼을 위해 용감해지기로 했어요.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전 지금 나무바닥 위의 낡은 옷걸이에 가득한 옷들을 보고 있어요. 지하의 작은 편집숍이에요. 맨해튼스라는 이름이 좋아서인지 저는 이곳을 자주 들르곤 해요.

이곳엔 70년이 넘은, 100년의 전통이 있는 옷과 모자가 있어요. 로스앤젤레스부터 에버릿에서 온 옷들과 제가 사랑하는 뉴욕의 맨해튼에서 온 모자도 있어요. 아직도 창립자 할아버지가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꼼꼼하게 맡아 만드는 그런 옷들과 모자요. 예부터 오늘날까지 옷을 지키는 장인들의 숨결이 머물러 있는 곳이죠. 자부심, 그러니까 시간이 만드는 자부심은 쉽게 꺾이지 않죠.

홍대는 사라지고 있어요. 아니 진정한 홍대는 사라지고 있어요. 이미 이곳은 자본으로 팽창해졌어요. 대형 스파 브랜드와 프랜차이즈 점포에 길을 내준 지 오래예요. 이 동네를 사랑한 이유는 작건 크건 점포 하나하나에 주인의 손길이 느껴져서였죠. 하지만 이젠 대형 기업들이 홍대를 만들고 있어요. 홍대에 열광했던 세대들은, 그리고 그곳의 주인들은 합정으로, 더 나아가 연남동으로 상수로 밀리고 있어요.

자본으로 살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자부심이죠, 시간이 쌓아 올린 자부심요. 일층에서 지하로, 일층에서 이층으로 자리를 옮기는 곳들이 많아져요. 전 들어가면 연예인들의 화보가 잔뜩 걸린 곳이 아니라, 작은 소품들이 여기저기 산만하지만 멋지게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을 원해요. 옷 하나하나에 영혼이 깃든 그런 곳요. 상수의 점포들은 멀뚱이 걸으면 지나치는 곳이고 샅샅이 걷다 보면 나타나는 곳이죠. 전 이곳을 오래오래 걷다가 우연히 지하의 작은 맨해튼을 마주친 거죠. 전 대기업의 값싸고 역사가 없는 옷들과 싸우는, 직접 디자인하고 직접 공정을 행하는 장인들의 옷을 데려와요. 옷 하나로 맨해튼에 간다는 것은, 모자 하나로 중년의 근사함을 얻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죠. 자부심으로 찍힌 made in usa. 전 made in 상수, made in 합정, made in 홍대를 꿈꿔요. 이곳이 더욱 번잡스럽지 않길, 모두가 알고 모두가 손쉽게 지나치는 곳이 아니길 꿈꿔요. 여전히 맨해튼을 꿈꾸듯 이곳이 더 이상 밀려나지 않았으면 해요. 이곳은 충분히 근사한 곳이었던 걸 우린 모두 아니까요.

혼자거나 아니거나-무대륙,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357-7
우린 자주 혼자이고 종종 함께네요. 전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게 됐어요. 요즘은 외롭다는 생각이 한 걸음 더 들어요. 그래서 오늘도 이곳에 왔어요. 당신에게 보낼 이 글을 적기 위해서요.

혼자일 땐, 감자 수프를 먹어요. 밥알을 씹을 때의 서러움이 있거든요. 씹는 소리가 나지 않는 감자 수프를 조용히 먹어요. 빵을 수프 깊이 담갔다 입에 넣어요. 따뜻한 카페라떼를 함께 마시면 제 점심 겸 저녁은 대충 끝이 나요.

함께일 땐, 용감해져요. 먹고 싶은 것들을, 당신이 먹고 싶어하는 걸 맘껏 시켜요. 바질 페스토 필라프와 프레쉬 모차렐라 토마토 파스타를 시켜 서로의 접시에 음식을 옮겨요. 간단한 맥주가 하고 싶은 날엔 타이 프라이드치킨을 시켜요. 이곳의 음식들은 어디에서도 못했던 맛일 거예요. 이곳을 기억하게 될 거예요.

무대륙. 이곳은 혼자 가도, 누군가와 함께 가도, 브런치를 먹어도, 커피만 마셔도, 와인을 마셔도 어색하지 않은 공간이에요. 무심하게 칠해진 페인트가 좋아서, 커다랗고 낡은 스피커가 좋아서, 얼기설기 매달린 주황색 전구들이 좋아서, 무엇보다 커다란 테이블이 좋아서 가는 곳이에요. 사랑하는 연인과 가면 테이블 건너의 애인이 멀게 느껴질 정도로 큰 테이블요. 홀로 테이블에 커피와 함께 편지지나 원고를 함께 둘 때 이곳만큼 좋은 곳은 없어요.

무대륙. 이곳엔 친구들과 브런치를 먹는 숙녀들도 있구요. 애인과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리고 저처럼 혼자 와서 커피를 마시며 당신을 생각하는 소년도 있겠죠.

공감스토리텔링-걸어본다 홍대

당신에게 쓰는 문장은 홀로 떼어놓아도 함께 모아두어도 괜찮은 것 같아요. 이곳이 그래요. 하나의 논지 없이도 자연스러운 곳이에요. 조용히 들어갔다가 전 이제 조용히 나와요. 오늘 하루 잘 마무리해요.

<성동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