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일못 정부’에서 별일 없이 살고 싶다

오늘도 나는 다짐한다. 속절없이 스미는 공포에 나를 담그지 말고, 부질없는 희망 따윈 거두고, 되도록 손이나 박박 씻으며 사랑하는 이웃들과 더불어 명랑하게 살 것. 이것이 현재까지 내가 내린 생존 방식이다.

K언니는 세월호 이후 버스가 갑자기 서거나,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나면 두려워졌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는 반대다. 안전 불감증이 더 심해졌다. 지금 상태로는 세상이 망했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배에 갇히거나, 균이나 바이러스에 노출되거나,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깔리거나 어느 한 곳도 안전한 곳이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의 숙명이랄까. 그렇다고 빨리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가늘고 길게 살고자 하는 ‘생명 연장의 꿈’이 나에게도 있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에 별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이 ‘메르스 예방법’을 공유하고, 거의 무정부 상태의 방역 실태를 성토했지만 이상하게도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지긋지긋했다.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특별할 것도, 나아지지도 않는 지리멸렬한 ‘일못’의 반복이 괴담보다 더 무서웠다. 장판을 거두면 드러나는 검고 습한 곰팡이처럼 ‘메르스’가 감추고 있는 것들을 상상하기도 버거웠다. 종말이란 이런 것이겠구나. 신이 드라마틱하게 짠! 나타나 뿅! 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나 가난, 폭력 등 피할 수 없는 공포에 반복적으로 내몰려 미친 듯 고통받다가 종말의 종말을 경험도 못하고 죽는 것이겠구나. 이것이 신이 우리에게 내린 가혹한 형벌이구나. 차츰,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정부의 ‘일못’을 규탄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정부를 칭찬하고 싶은 점이 많다. 우선, 정부는 대다수의 민을 각성시켰다.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더 이상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며 우리는 모두 ‘능동적인 개인’이 되었다. 바이러스에 대해 동네 멍멍이도 빠삭하게 알 정도로 지식을 습득했으며 정부가 ‘안알랴줌’으로 일관했던 메르스 확진 병원 지도도 스스로 만들어 공유했다. 또한, 정부는 개인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가 주체적으로 나서서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그토록 원하던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교과서에서만 보던 그리스 ‘도시 국가’를 2015년, 대한민국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성완종 리스트, 황교안 국무총리 인사 청문회, 탄저균 등 심신 건강 해치는 사건은 싸악~ 잊고, 심플하게 메르스에만 집중하여 건강을 도모하도록 정보를 적절하게 통제한 점도 참 고마운 일이다. ‘굳은 의지만 있으면 병마를 이길 수 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조언도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다. 덕분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리라’는 신앙도 생겼으니 국민의 안전뿐 아니라 영적인 필요도 돌보는 살뜰한 정부를 어찌 규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고마운 나라에 살면서 불온하게도 이런 상상을 해봤다. 어느 날, 감기 비스무리한 것에 걸렸는데 며칠 콜록거리다가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미처 알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죽은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통과하는 대기실로 가게 된 나는 그 대기실 담당자인 천사에게 따졌다. “저, 왜 죽었어요? 평소 아프지도 않았고, 의료보험료도 꼬박꼬박 냈는데….” 천사는 난감해했다. “어, 그건 말이지. 너의 안전을 지켜야 할 정부가 ‘일못’이라 네가 알아서 잘 살아남았어야 했는데….” 그는 말끝을 흐렸다. 똑같은 질문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으므로 급하게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어휴, 오늘만 몇 명째 같은 질문을 하네. 작년 4월 16일에도 그러더니…. 도대체 그 정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정부는 ‘각자도생(各自圖生) 사회’가 도래했다는 종말론적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일못 정부’가 메르스처럼 꿋꿋하게 번식하는 것처럼 “각자도생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무럭무럭 자랐다. 이제 나의 소망은 “별일 없이 살고 싶어요”가 되어 버렸다. 오늘도 나는 다짐한다. 속절없이 스미는 공포에 나를 담그지 말고, 부질없는 희망 따윈 거두고, 되도록 손이나 박박 씻으며 사랑하는 이웃들과 더불어 명랑하게 살 것. 이것이 현재까지 내가 내린 생존 방식이다. 내 귀한 목숨을 겨우 ‘일못 정부’에 위탁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별일 없이 살고 싶을 뿐이다.

<오수경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