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예산 삭감·관광공사 수장 사표… 곳곳서 파열음
“도대체 문화산업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 때는 그래도 대화는 됐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누구랑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말한들 합리적인 토론이 안 된다.” 부산 출신의 여권 관계자는 최근 문화계 분위기와 관련, 이같이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이대로 가면 문화관광산업은 박살난다.”
카지노 확대와 학교옆 관광호텔은 논란
박근혜 정부의 문화관광정책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국제영화제는 때아닌 예산 삭감으로 홍역을 앓고 있고, 칸 영화제에서 열린 ‘한국영화의 밤’ 행사에는 부산영화제 관계자들과 영화인들이 대거 불참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최대 공공기관으로 ‘한류’붐을 지원하겠다던 관광공사의 수장은 석연찮은 이유로 사표를 던졌다. 올해 가장 큰 행사라는 밀라노 엑스포의 ‘한국관광대전’은 수장도 없이 치러지고 있다. ‘문화융성’을 국정과제로 내세우면서 꺼내놓은 대책의 핵심은 카지노 확대와 학교옆 관광호텔 짓기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야당과 시민단체, 지역이 반발하면서 새로운 갈등만 키우고 있다.
5월 26일 부산영화인연대와 부산예술단체총연합회 등 206개 부산지역 문화예술단체와 시민단체는 ‘부산영화제를 지키는 범시민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대책위는 선언문을 통해 “한국영화제를 대표하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더욱 육성하고 발전시켜가는 것이 문화융성을 위한 기본방향”이라며 “이번 예산 삭감은 지역 영화 발전을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1996년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로 20회를 맞는다. 성인식을 앞두고 정부가 준 선물은 ‘예산 삭감’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4월 30일 ‘2015 글로벌 국제영화제 육성지원 공모 결과’를 발표하면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지원금을 8억원으로 책정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14억6000만원과 비교하면 절반이 뭉텅 잘려나간 것이다. 심사점수는 부산국제영화제가 가장 높았다. 하지만 국내 영화제 중 유일하게 예산을 삭감당했다.
영진위가 국제영화제 예산을 삭감한 이유로는 지난해 국제영화제 때 마찰을 빚은 ‘다이빙벨’ 상영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해석된다. ‘친박’ 의원 출신인 서병수 부산시장은 ‘다이빙벨’ 상영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제 독립성을 들어 영화 상영을 강행했다. 영화 상영 직후 부산시는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고 19개 지적사항이 담긴 결과를 일방적으로 공표했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사퇴 압력을 받았고, 영화인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맞섰다. 부산시는 일부 영화인들을 상대로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자리를 타진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하지만 부담을 느낀 영화인들이 거부하면서 유야무야됐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공격은 이명박 정부 때도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좌파 영화제로 규정했다. 당시 유인촌 장관은 김동호 집행위원장 등을 압박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이후 부산국제영화제를 ‘좌파’로 규정짓고 손을 대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문제는 앞에서는 이념을 내세우지만 자기 사람에게 자리를 챙겨주겠다는 속내가 깔려 있다”고 말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측과 영진위의 갈등은 칸 영화제에서 ‘두 집 살림’을 차리는 상황으로 번졌다. 5월 18일 영진위 주최로 열린 ‘한국영화의 밤’ 행사에는 한국영화 관계자들이 대거 불참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측은 앞서 17일 별도행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 김세훈 영진위원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한국영화는 참패했다.
‘주목할 만한 시선’ 등에 한국영화가 초청됐지만 빈 손으로 돌아왔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영진위가 별도의 행사를 가진 것은 8년 만에 처음이다.
한국영화계가 내분으로 삐걱대는 사이 상반기 한국영화는 암담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5월 말까지 개봉한 한국영화 41편 중 200만명을 넘긴 영화는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 등 단 3편뿐이다. 그나마 최고 흥행작이 동원한 관객은 387만명으로, 400만명도 못 모았다. CJ E&M과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한 영화 중 200만명 이상 동원한 영화는 아예 없다. 그 사이 ‘어벤져스2’는 10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킹스맨’도 900만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끌어모았다.
연극계도 엉망이다. 5월 18일 열린 서울연극제 폐막식은 극장이 아닌 야외인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서 열렸다. 30년 넘게 연극제가 열렸던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대관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르코 예술극장은 연극제 개막 하루 전 “중대한 안전상 하자가 발생했다”며 돌연 수리에 들어갔다. 서울연극제는 서울시내 곳곳의 극장을 수배해 어렵사리 행사를 이어갔다. 아르코 예술극장의 운영책임자는 문체부 산하 문화예술위원회다. 연극계는 문화예술위원회 등을 업무방해 혐의로 형사고소했다. 연극인들은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과 연대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데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보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같은 형식의 ‘손보기’라는 것이다.
‘돈은 정부가 주는데 왜 말 듣지 않느냐’
문체부의 가장 큰 공공기관인 한국관광공사는 지난 4월 이후 사장이 공석이다. 변추석 전 사장이 돌연 사표를 냈기 때문이다. 문체부는 변 전 사장이 건강 등의 사유로 사직했다고 밝혔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워 보인다. 취임 1년도 안 된 사장이 밀라노 엑스포를 앞두고 사표를 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는 징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문체부와의 갈등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관광 활성화를 위해 문체부가 관광공사와 협의 없이 각종 사안을 추진하면서 마찰을 빚은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변 전 사장은 대선 캠프에서 미디어홍보본부장을 맡은 친박 인사다. 변 전 사장은 국민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김종덕 문체부 장관은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다. 그런 상황에서 김 장관의 ‘지시’를 받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변 전 사장의 갑작스런 사퇴로 한국관광공사는 사장 없는 ‘한국관광대전’을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화관광 정책으로 내세운 카지노와 호텔 규제완화, 외국인 의료관광객 유치는 논란만 뜨겁다. 카지노 확대 정책은 국내선 크루즈에 대한 카지노 설치 허가와 오픈 카지노(내국인 출입 카지노) 논란으로 확대된 상태다. 강원랜드와 폐광지역 주민들이 반발하면서 지역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외국계 의료관광객 유치는 영리병원과 맞물리면서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 옆에 관광호텔을 짓도록 허가하는 관광진흥법 개정안은 ‘대한항공 특혜법’으로 불리면서 국회에 계속 계류 중이다.
익명을 요구한 문화계의 한 인사는 “‘돈은 정부가 주는데 정부 말을 듣지 않는 게 말이 되느냐’는 정서가 정부 내에 상당한 것 같다”며 “문화예술계에 대한 예산은 국민의 돈이지 어떻게 국가의 돈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고, ‘문화융성’의 목적이 문화산업 육성인지 문화예술계 길들이기인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