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유저’를 넘어 창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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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오타쿠,  ‘유저’를 넘어 창조하라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 지음·선정우 옮김·북바이북·1만2000원

‘순문학의 죽음’이라니, 선정적이다. 요즘 독자가 한국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기사가 종종 나오는 판이라 더욱 그렇다. 작가이자 편집자이자 평론가인 오쓰카 에이지는 1990년대 일본의 ‘순문학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극소수밖에 보지 않는 문예지, 그들에게만 중요하고 통용되는 문제란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 1억 2000의 일본인 중에서 단 800명만이 보는 문예지 ‘신초’를 두고 오쓰카가 하는 말이다. 신초만이 아니라 소수밖에 보지 않는 ‘순문학’이 소위 문학의 중심이라며 대우받고 권위를 주창하는 것을 공격한다. 전혀 출판사의 이익에 기여하지 않는 ‘순문학’이 만화가 벌어들이는 막대한 돈을 펑펑 써가며 오히려 만화를 천시하는 경향에 분노한 것은 만화 스토리작가이자 편집자인 오쓰카에게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출판사들이 만화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것은 아니니 일본의 상황과는 다르다. 하지만 한국의 ‘순문학’도 이미 그들만의 리그가 된 상황에서는 ‘죽음’이라는 현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는 있다.

한국의 만화 칼럼니스트 선정우가 오쓰카 에이지를 인터뷰한 <오쓰카 에이지: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에서 중요한 부분은 순문학의 죽음보다는 오타쿠와 스토리텔링에 있다. 일본의 오타쿠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에 몰두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들은 단지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보고 싶은 작품을 직접 창조하는 일에 뛰어들면서 일본 대중문화의 격을 한껏 상승시켰다. 일찌감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매혹되어 일본에서도 만들어보겠다는 욕망을 실현시킨 만화의 신 테즈카 오사무의 뒤를 수많은 오타쿠가 따라갔던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든 안노 히데아키는 한때 오타쿠 4천왕의 하나로 불렸고, 제작사인 가이낙스는 오타쿠들이 모여 만든 회사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오쓰카 에이지는 “과거에는 오타쿠가 ‘크리에이터’였는데 지금은 ‘유저’가 된 것이 치명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저화된 오타쿠 중에서 새로운 세대의 크리에이터가 나오지 않고 있는 거죠”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문화상품을 끊임없이 옮겨 다니면서 소비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인터넷을 통해 모든 것에 접속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욕망을 해소하는 오타쿠로 충분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21세기 이후의 문화는 점점 세분화되고 좁아지면서 고립되었고 서로 소통이 어렵게 되었다. 특정한 소비에만 머무르면, 비판과 회의 없이 몰두하기만 하면 결국은 평면적인 사고밖에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오쓰카는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보기를 권한다. 창조를 통해서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 자신만의 좁은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서.

오쓰카 에이지는 현장에서 작가와 편집자로 숙련된 경험을 쌓은 평론가다. 이론적으로 상황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을 토대로 문제를 파악하고 이유를 캐낸다. 그의 말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이유다. 이제 한국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순문학은 망했고, 대중은 창조보다 소비에 더욱 빠져든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대화하지 않고, 울타리를 뛰어넘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읽어보자. 세상은 이미 변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들 갈라파고스에 갇혀 이전투구 중이다.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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