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郵政)이야기]1년 뒤 받아보는 ‘느린 우체통’

느림의 철학, 느림의 미학, 느림의 가치, 느림의 행복, 느림의 여유, 느림의 묘미….

느림과 어울릴 법한 단어들이다. 이들 단어에 관통하는 의미는 치유다. 그렇다면 치유의 대상은 무엇일까. 느림의 상대적 의미는 빠름이다. 그렇다면 속도에 대한 치유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듯하다.

우정사업본부가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오는 15일까지 1년 뒤에 받아보는 ‘느리게 가는 우체통’을 운영한다. 사진은 영풍문고 4개점(종로, 여의도, 코엑스, 김포공항) 포스트존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우표가 붙어 있는 예쁜 그림엽서’. | 우정사업본부 제공

우리는 초고속 사회에 살고 있다. 초고속 시대는 속도와 경쟁한다. 생각의 속도, 정보의 속도, 학습의 속도, 업무의 속도, 결정의 속도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 심지어 애정도 시간과 경합한다. 속도가 경쟁력인 셈이다. 속도 경쟁력은 더욱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광랜 시대를 넘어 기가토피아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작용과 반작용도 세상살이의 법칙이다. 속도 경쟁이 격화될수록 욕속부달(欲速不達·빨리 하려고 하면 오히려 도달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상실감도 커진다. 쾌속질주의 부작용이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부작용의 피로감은 커진다. 속도를 제어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이유다. 속도에 대항해서 천천히 사는 지혜를 추구하는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게 바로 ‘느리게 살기(슬로시티) 운동’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한가로운 것들로부터 내면적 희열을 얻으려는 운동이다. 우정사업본부도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이 운동에 동참했다. 영풍문고와 함께 편지를 1년 뒤에 받아보는 ‘느리게 가는 우체통’을 운영한다. 오는 15일까지 서울 지역 영풍문고 4개점(종로, 여의도, 코엑스, 김포공항) 포스트존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우표가 붙어 있는 예쁜 그림엽서’에 편지를 써 현장에 설치된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 원하는 곳으로 배달된다. 특히 엽서에는 영원우표가 인쇄돼 있어 변하지 않는 가족사랑의 의미를 더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영원우표는 시간이 흘러 우편요금이 올라도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우표를 말한다.

사실 1년 뒤에 편지를 배달하는 ‘느리게 가는 우체통’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관광지를 중심으로‘느린 우체통’이 속속 들어섰다. 부산 앞바다가 보이는 초량 이바구길의 ‘유치환 우체통’, 서울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인천 영종대교 기념관과 전남 완도군 청산도 범바위, 그리고 경부고속도로 청원 휴게소, 경남 거제시 해양파크 등 수십 곳에 ‘느린 우체통’이 세워져 있다. 드디어 관광지를 벗어난 도심 속의 ‘느린 우체통’도 태어났다. 도시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서울 조계사 옆의 우정총국우체국 입구와 부산 경성대에도 ‘느린 우체통’이 세워졌다.

그렇다면 ‘느린 우체통’ 의미는 무엇일까. ‘느린 우체통’과 시인이 만날 때 그 의미는 보다 또렷해진다.

김행숙 시인의 <느린 우체통>의 일부를 옮겨본다.

‘소금박물관 옆 느린 우체통 앞에서
낯선 나를 본다

만날 사람은 다 만났던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던가
이 세상 다녀가는 일 생각하면
짧은 꿈속 같다지만
이렇게 손에 잡힐 듯 맑게 갠 날이면
십 년 후의 나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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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걷는 길이 어둡지는 않았느냐고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어젖혔느냐고
나는 가만히 말할 것이다.’

<김경은 편집위원 jj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