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추리소설의 감초, 미워할 수 없는 악당들

20세기 초반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이 탄생시킨 아르센 뤼팽은 악당의 대명사라고 할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둑이다. 그는 단순한 도둑이 아니라 어떤 때는 프랑스를 위해 나서고, 어떤 때는 직접 탐정으로 활동하면서 악당을 잡아내기도 하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추리소설은 특정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이 책이나 저 책이나 비슷비슷한 내용’의 상투적인 구성이라고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범죄를 소재로 하고 논리적 추리를 거쳐 반전이 있는 결말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추리소설의 형식이다 보니 그러한 견해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하지만 작가의 개성이건, 혹은 ‘상투적 구성’이라는 편견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건 간에 추리소설은 차츰 변화했고 규칙에서 벗어난 작품도 적지 않다.

추리소설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역할이 있다. 일반적인 작품에서 등장하는 순서대로 보면 피해자·탐정·범인 등 세 부류의 인물이다. 대개 탐정이 주역, 범인은 조역, 피해자는 단역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끔 역할이 바뀌기도 한다.

추리의 주체, 즉 탐정(혹은 수사관)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대단히 보기 힘들지만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939)나 카트리느 아를레의 <환상의 여인>(1956) 등은 걸작으로 꼽히는 추리소설이면서도 정작 놀라운 추리력을 발휘하는 탐정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팡토마스

탐정과 악당의 흥미진진한 대결
그보다 더 드문 것이 피해자나 악당이 등장하지 않는 추리소설이다. 계획적 범행이건 우발적 사고이건 간에 피해자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아동용 추리소설, 혹은 ‘일상 미스터리’라는 형식의 작품에서는 아예 범죄 자체가 발생하지 않고 수수께끼를 푸는 탐정 역할의 인물만 등장할 뿐이다.

단역인 피해자와는 달리 악당은 이야기의 발단을 만들어내는 인물이며, 명탐정과 악당 사이의 대결은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는 큰 줄기다. 유명한 탐정과는 달리 악당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역시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등장한 수많은 범죄자 중 독자들의 기억에 남는 이름은 아마 모리어티 교수가 아닐까. 그는 ‘범죄의 나폴레옹이며 런던이라는 대도시의 나쁜 짓 절반, 미궁에 빠진 사건 거의 전부에 관련된 인물’이다. 배짱 좋은 홈즈마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만든 거물 악당이다. 요즘 같으면 세계 정복을 꿈꾸는 인물 정도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의 존재감에 비해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비중은 굉장히 빈약하다. 홈즈와 격투를 벌이다가 폭포에 떨어져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명성을 아까워한 영국 작가 존 가드너는 <모리어티의 귀환>(1974), <모리어티의 복수>(1975), <모리어티>(2008)등 3부작을 통해 70여년 만에 희대의 악당을 되살려냈다.

블로펠드

이처럼 악당들에 대한 독자들의 선망(?)은 꽤 뿌리가 깊은 것 같다. 실제로 악한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은 추리소설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6세기 중반 스페인에서 탄생한 ‘피카레스크 소설’은 ‘피카로’(스페인어로 ‘악한’을 뜻한다)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1인칭으로 고백하는 형식의 소설로 유럽 각국 독자들의 인기를 얻었다.

피카로의 후예는 유럽에서 다시 탄생해 인기를 얻는다. 20세기 초반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이 탄생시킨 아르센 뤼팽은 악당의 대명사라고 할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둑이다. 장 폴 사르트르가 ‘암흑가의 시라노’라 일컬은 이 괴도신사는 강인하고 배짱 좋으며 머리까지 뛰어나서, 언제 훔치러 간다고 예고를 할 만큼 범죄를 즐기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도둑이 아니라 어떤 때는 프랑스를 위해 나서고, 어떤 때는 직접 탐정으로 활동하면서 악당을 잡아내기도 하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뤼팽보다 몇 년 늦게 등장한 팡토마스는 역시 프랑스의 범죄자다. 마르셀 알랭과 피에르 수베스트르의 작품에 등장하는 팡토마스는 ‘현대의 메피스토펠레스’ 또는 ‘공포의 대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람들을 공포로 떨게 만드는 일을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신사라고 부를 만한 뤼팽과는 달리 팡토마스는 오직 ‘악(惡)’만을 추구한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사이코패스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모리어티

약 반세기 후 여성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에 의해 새로운 사이코패스 주인공이 등장한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인 <재능 있는 리플리>의 주인공이다. 톰 리플리는 신중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인물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죄의식이 없는 무서운 인물이다. 미국 출신인 하이스미스는 <재능 있는 리플리>를 발표한 뒤 공교롭게도 뤼팽과 팡토마스의 고향인 프랑스로 건너가 살았다.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에서는 좀 더 규모가 커져서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이 등장한다. 에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는 세계 규모의 범죄조직 ‘스펙터(SPECTRE)’의 우두머리로 세계 정복을 꿈꾸는 인물이다. 폴란드 출신인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비밀리에 정보기관을 만들어 연합국과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양쪽에 정보를 팔았으며, 전세가 기울어질 무렵에는 연합국 쪽으로 협력하여 전쟁이 끝난 후에는 훈장까지 받았다. 그 후 남미로 건너가 스펙터라는 조직을 설립한 것이다. 영화에 등장한 그의 대머리 이미지는 요즘 악당의 희화화로도 많이 쓰이고 있다. 플레밍이 본다면 격세지감을 느낄 것 같다.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는 여러 명의 주인공을 창조했는데, 수사관보다 악당을 오히려 주인공으로 더 많이 등장시켰다. 거대한 범죄조직과 싸우는 악당 ‘파커’, 거창한 도둑질 계획을 꾸미지만 항상 불운이 끼어들어 실패만을 거듭하는 존 도트문더가 대표적 주인공이다.

<아르센 뤼팽> <닉 벨벳 단편집>

소설 악당보다 훨씬 사악한 현실 악당
반세기 넘게 작가로 활동하는 동안 다섯 편의 장편, 그리고 1000편 가까운 단편 추리소설을 발표한 에드워드 호크는 독특한 도둑을 탄생시켰다. 닉 벨벳은 프로(?) 도둑으로, 일반적인 범죄자와는 다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무엇이든 훔쳐낸다. 동물원의 호랑이, 수영장의 물, 오래된 거미줄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지 의심스러운 물품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손에 넣는 것이다. 훔치는 요금은 1966년 처음 등장했을 때 2만 달러에서 21세기에는 최고 5만 달러까지 상승했지만, 실력이 보장되는 만큼 의뢰인은 끊어지지 않는다.

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

이처럼 파격적으로 전면에 나선 악당은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상투성을 벗어나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요즘 신문이나 뉴스에서는 소설 속 악당보다 훨씬 사악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어쩐지 세상도 파격적으로 변해버린 것 같다.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