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1g의 희망’을 붙잡기 위해 듣는 쉬츠

무한한 가능성과 지녔던 목숨들이 고통 속에서 숨져갔고, 그 이후 귀한 생명과 그 가족들은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모욕까지 당하는 상황이 재연되었으니, 도대체 어디서 1g의 희망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습한 대기에 안개가 자욱이 끼어 겨우 날이 밝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춥고 음습한 19세기 말 동유럽의 철로 위를 열차가 달린다. 페테르부르크와 바르샤바 사이를 달리는 열차 안에는 얼핏 보기에 순진하다 못해 바보 같은, 세상 물정도 모르고 어리숙해 보이는, 그래서 사람들이 경멸조로 ‘백치’라고 희롱하는 미슈킨 공작이 타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바로 그 사람이다. 소설의 표면에서 이 어리숙한 인물은 그야말로 백치 같은 언행을 하지만 소설의 심층에서, 그는 평범한 인간은 흉내도 낼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고결한 인물이다.

17세기 독일의 음악가 하인리히 쉬츠의 70세 전후 모습을 담은 초상화. / 위키백과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에 있는 희망
미슈킨은 ‘으스스하고 습한 11월 러시아의 밤을 등줄기에 소름이 돋은 채로 참아 내야만’ 했던 3등칸의 기이한 승객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 가운데 한 사나이, 광기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의 시간을 모조리 손에 잡을 수 없는 정념에 투사한 채 파멸해 가는 로고진이 있다. 그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중이다. 열차가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은 서로 밀쳐내면서 이끌리는 자석처럼 교류를 하게 되고, 얼마 후, 미슈킨은 로고진의 저택을 방문하게 된다.

로고진. 거부의 아들이자 거세파 교도(신체적 거세를 통해 욕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신흥종교)의 후예이며 끝없이 돈에 집착하되 그 또한 한 줌에 내던져버리고 싶어하는 니힐리스트 로고진의 집에는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은 가문답게 온갖 그림들로 넘쳐난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유럽에 머물면서 이름난 그림들을 견문해 본 일이 있는 미슈킨 공작, 즉 우리의 백치는 로고진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걷다가 어떤 그림 앞에서 멈춰선다. 로고진은 다른 그림들은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선친이 구입한 싸구려들이지만 저 그림만큼은 그래도 꽤나 훌륭한 복제품으로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며 팔 수 없냐고 물어보더라고 말한다. 미슈킨 공작도 덧붙인다.

“그런데 이 그림은 한스 홀바인의 복제품이네. 나는 대단한 전문가는 아니네만 이건 아주 뛰어난 복제품 같아. 나는 이 그림을 외국에서 보고 통 잊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자네는 대체….”

왜 미슈킨은 이 그림, 즉 한스 홀바인의 그림 앞에서 멈춰선 것일까. 그리고 왜 알 수 없는 말, 즉 “하지만… 자네는 대체…”라고 말하는 것일까.

도스토옙스키는 사실 주인공 미슈킨의 입을 빌려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일을 쓰고 있는 중이다. 소설 <백치>에 강렬하게 반복하여 나타나는 홀바인의 그림은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이라는 작품이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형을 당한 예수. 적어도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까지 서양 미술사의 거장들은 이 역사적이며 종교적이며 극적인 상황을 대단히 경건하게 그려 왔다. 그런데 홀바인은 참혹하게 그렸다. 예수라는 ‘최소한의 표지’라도 없다면 며칠째 굶다가 아사해버린 행려병자에 가깝다. 온몸은 얻어맞아 피멍이 들었고 병사들의 날카로운 창이 유린한 상처도 곪아터졌다. 입을 벌린 채 죽어 있는 예수는, 적어도 의료적 관점에서는, 부활의 기적은커녕 그 어떤 삶의 기미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참담한 시신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고 스스로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다. <백치>에서는 미슈킨낀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고진의 집에 있는 그 그림에는 그러한 아름다움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매달리기 이전에 참고 견디어 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자국들을 지닌 인간 시체를 완벽하게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그분’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무게를 못 이겨 쓰러졌을 때 병정들과 하층민들에게서 받은 구타와 고문이 남긴 상처의 흔적들이었다. (중략) 그의 신도들이 직접 눈으로 이와 같은 시체를 보게 되었다면(그 시체는 확실히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 광경을 마주하며 그들이 어떻게 그 수난자가 부활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이 절실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소설 안에, 그 끄트머리에 있다. 인간 영혼이 100g 정도 된다면 그 안에 1g 정도의 신성이 그래도 남아 있어 그 미약한 힘이 어느 순간 99g을 압도하고 정화하여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신념을 도스토옙스키는 진심으로 믿었다. 모든 가치가 파괴되고 모든 말들이 가증스러운 웃음으로 표변하고 모든 언어가 금세라도 부도날 게 뻔한 상황일지라도, 1g의 신성만 있다면 그것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황량한 들판을 채울 것이라고 도스토옙스키는 생각했다. 그래서 <백치>를 써서 로고진의 극단적 참회를 그려냈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당장 온 가족이 굶어죽어 나갈 형편임에도 최소한의 자존심을 짓뭉개는 적지 않은 돈을 차디찬 바닥에 던져버리고 낡은 구둣발로 짓이겨대는 퇴역 군인을 묘사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1g의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홀바인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다시 그림을 보면 “구타를 당해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고, 지독한 피멍이 들어 퉁퉁 부어 올라 있었으며, 두 눈이 감기지 않은 채 동공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처참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예수는 마지막 1g의 힘을 오른손에 집중하여 세 개의 손가락으로 ‘최소한의 표지’ 즉, 삼위일체의 완전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부분)./ 위키백과

비참하게 죽어간 자들을 위로하는 음악
하인리히 쉬츠의 종교음악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을 듣는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이다’로 시작하여 ‘다 이루었도다’로 끝이 나는 참혹한 형벌,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남긴 마지막 일곱 말씀을 바탕으로 초기 바로크 음악의 대가인 쉬츠가 작곡한 수난곡이다.

1645년쯤에 작곡했는데, 이때는 독일 전역을 오랜 세월 동안 휩쓴 ‘30년 전쟁’이 마지막 고비를 넘기던 때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근대적 국가들의 패권 전쟁으로 인하여 쉬츠가 살았던 독일, 특히 작센 일대는 도처에 시신이 방치되어 있는 거대한 무덤이었다. 쉬츠는 마치 홀바인의 그림이 그러하듯이, 숨이 끊어질 듯 말 듯한 극도의 경건성으로 일곱 말씀을 들려준다. 예수의 말씀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자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이런 음악을 이 계절에, 듣고 또 듣는 것은 고통스럽다. 누군가는 부활절이라는 종교적 계기로 삼아 듣기도 하겠지만, 특정한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그동안 음악사의 소중한 유산으로서 들었을 뿐인데, 그러나 이 참담한 계절에는 어쩔 수 없이 1g의 말이라도 구해보고자 들어보는데, 그러나 고통스럽다.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과 그 자체로 생명의 청신함과 고결함을 지녔던 목숨들이 몸서리쳐지는 고통 속에서 숨져갔고, 그 이후 영원한 정성과 무한의 시간을 다 바쳐 위로해도 부족할 귀한 생명과 그 가족들은 오히려 십자가 형벌만큼이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모욕까지 당하는 상황이 재연되었으니, 도대체 어디서 1g의 희망, 한 줌의 가능성, 반큰술이나마 어떤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홀바인의 그림에서 그래도 예수는 마지막 기운을 모아 손가락 세 개의 표지라도 남겼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만큼의 여지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처참한 판국에 쉬츠라도 듣는 것은 다만 마음의 알리바이일 뿐이니, 이 또한 괴로운 일이다.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결국 1g의 희망은 그것을 찾기 위해 거리에, 광장에 모여드는 사람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