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농익은 연기로 돌아온 ‘경숙이, 경숙아버지’

어디선가 폭격 소리, 비행기 소리가 들린다. 전쟁이 났나 보다. 허둥지둥 등장한 경숙 아배가 정신없이 짐을 챙긴다. 이를 본 어메와 경숙이도 덩달아 보따리를 싸지만 아배는 전 재산인 집은 누가 지키느냐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놀란 경숙이가 “아부지! 내는 아부지 없이 우예 살라고요” 하고 매달리지만, 아배는 “깝깝한 년! 니는 어메가 옆에 안 있나? 너희는 둘! 내는 쏠로! 진정 외로운 사람은 내다!”라고 우기며 홀로 떠난다.

그렇게 전쟁 중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떠난 경숙 아배는 그 뒤로도 평생 집에 붙어 있질 않는다. 잊을 만하면 나타났다가 다시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아배가 돌아올 때마다 경숙이네 집에는 묘한 가족들이 생겨난다. 전쟁이 끝난 후 아배가 데리고 온 꺽꺽이 아재는 아배가 다시 집을 떠난 사이에 경숙 어메와 경숙이 동생을 만들고, 이를 너그럽게 이해해 준 아배는 어메의 해산에 즈음하여 작부 출신 새엄마 자야를 데리고 나타난다. 결국 어메와 경숙은 자야, 꺽꺽이 아재와 함께 가족 아닌 가족이 되어 서로 보듬고 살아가지만, 마지막까지 경숙이 아배는 그들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경숙이, 경숙아버지>. | 극단 골목길

박근형 작, 연출의 <경숙이, 경숙아버지>는 우리 시대, 혹은 우리 윗세대 아버지들의, 아버지들에 대한, 그리고 그들을 위한 이야기다. 가부장적이고 무능한 아버지, 도무지 무언가를 책임지려고 하지 않고 바람처럼 살아간 아버지, 그러나 누구보다 속정이 깊었던 아버지 말이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경숙 아배의 모습에서 어디서 한 번쯤 본 듯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진다. 하릴없이 배동나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 흐드러진 젓가락 장단에 맞춰 뽑아내는 아배의 구성진 노래에서 뭔지 모를 슬픔이 묻어나고, 경숙의 대학 졸업식장에 홀연히 나타나 구두를 선물하고 사라지는 아배의 뒷모습에 안타까운 눈물 한 방울이 흐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2006년 초연 당시 <경숙이, 경숙아버지>는 올해의 예술상, 대산문학상 희곡상, 히서연극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선정되었고, 동아연극상 작품상, 희곡상, 연기상, 신인연기상 등 연극계 상이란 상은 다 휩쓸어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2009년에는 KBS에서 4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2009년에는 예술의 전당 명품연극시리즈로 무대에 올랐던 <경숙이, 경숙아버지>가 2015년 수현재컴퍼니＆씨어터 1주년 기념작으로 선정되어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이번 공연에서 김영필, 고수희, 주인영, 황영희, 김상규 등 초연 무대를 빛냈던 극단 골목길 배우들을 모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뭔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 허투루하면서도 묘한 연민과 멋이 흐르는 경숙 아배의 캐릭터에 김영필만큼 잘 어울리는 배우도 찾기 힘들 것이다. 경숙 어메 역의 고수희와 경숙이 역 주인영의 연기도 그간 세월을 거치며 한층 다양한 겹의 색깔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자야, 꺽꺽이 아재 역을 맡은 황영희, 김상규 등 골목길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와 능청스런 사투리는 연극에 맛깔스런 감칠맛을 더한다.

문화내시경

양철 대야와 이불 보따리, 밥상과 장구 외에는 별다른 장치나 도구를 찾아볼 수 없는 무대는 소박함을 넘어 초라함까지 느껴지고 제대로 된 의상이나 분장이랄 것도 없지만, 이 뭔가 채워지지 않은 듯한 연극 속에는 분명 마음을 후려치는 순간이 있다. 이건 연극적인 감동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감정이다. 극단 골목길의 공연은 연극이 아니라 삶을 느끼게 해준다. 4월 26일까지, 대학로 수현재씨어터.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