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조선 영화의 샛별’ 문예봉을 아십니까?

영화는 그릇된 욕망을 쫓는 자들의 파멸을 예고한다. <미몽>에서는 주인공인 애순 외에도 자신의 욕망만 추구하는 비도덕적인 인물, 재벌 행세를 하는 사기꾼과 웃돈을 준다는 요구에 속도위반을 하다가 사고를 내는 택시기사가 등장한다. 근대화된 식민지 조선의 도덕적 타락과 물질 만능주의에 물든 이들의 파멸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무성영화 시대의 꽃이었던 ‘변사’. 배우보다 인기 있는 ‘톱스타’ 변사가 많았고, 변사가 소속 극장을 옮기면 팬들도 따라다녔으니, 극장주들이 인기 변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소리의 여백을 변사의 익살과 해학으로 옷 입혀서 변사의 입담에 따라 영화의 재미가 달라지는 무성영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무성영화는 1934년에 안종화 감독이 연출한 영화 <청춘의 십자로>다.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사랑에 울고 웃던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린 <청춘의 십자로>는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굴해낸 뒤 2012년부터 현대적 감각으로 재상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변사의 해설 없이 무성영화를 보는 건 이야기의 맥락을 읽어내기도, 졸음을 참기도 어렵다. 당시의 영화를 눈과 귀로 즐기려면 어떤 작품을 보아야 할까? 2006년에 발굴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유성영화 <미몽(迷夢)>을 추천한다. 영화의 스토리도 재미있지만 여배우 문예봉(1917~1999)의 마력(魔力)에 빠져들게 된다.

3월 26일. 문예봉의 기일인 오늘 <미몽> (1936)을 보며 문예봉을 추억한다. “서양엔 마를린 디트리히, 일본엔 이리에 다카코, 만주 이향란, 조선엔 문예봉이 있다”(1964,경향 늬우스)고 말할 정도로 조선이 꼽는 최고의 배우 문예봉. 2015년 스크린 속에서 비교 대상을 찾는 건 무리다. 그만큼 문예봉은 독보적이었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읜 후 아버지인 배우 문수일을 따라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한 문예봉은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 출연하면서 실력파 배우로 인정받았다.

문예봉. / 경향자료

유성영화 <미몽>의 ‘막돼먹은 애순씨’
길에서 만난 제비와 하룻밤의 쾌락을 즐기는 유부녀(미몽)의 심리와 가냘픈 조선 여인(<나그네>(1937))의 청순가련함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문예봉이 주연을 맡으면 영화는 흥행 성공이었다. 조선에서 최초로 제작된 유성영화 <춘향전>(1935)에서 춘향 역으로 인기를 얻은 뒤 경성촬영소에 입사하여 당시 인기 배우였던 김연실과 경쟁하기도 하였으나, 고정된 이미지가 강한 김연실보다 신선한 연기로 천의 얼굴을 만들어내는 문예봉에게 대중은 열광했다.

더불어 동양적인 눈매, 날렵하고 오똑한 코, 갸름한 얼굴, 하얀 피부, 동서양의 이미지가 오묘하게 섞인 미모를 갖춘 문예봉은 ‘조선 영화의 샛별’이라고 불렸다. 그녀의 연기를 두고 영상자료원은 “여성의 욕망 표출에 있어서 20년 뒤에 제작된 〈자유부인〉을 능가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미몽>이 발표된 1936년은 입센의 <인형의 집>이 발표된 시기와 같다. 이때는 ‘신여성 담론’이 대두되었던 시기였다. 남성 주류의 가부장적 사회가 ‘신여성’이라는 존재를 달갑게 볼 리 없었다. 이때부터 여성이 근대적 주체로 등장하면서 전근대적 남성과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는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반면, <미몽>의 주인공 애순은 주체성도 윤리성도 없이 남자와 돈만 밝히는 ‘막돼먹은’ 여성의 파멸 과정만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욕망’의 서사는 L. 골드만이 말하는 ‘타락한 시대의 타락한 방식’과도 일치한다.

<미몽>이 제작될 당시의 조선은 만주사변 후 호경기를 누리던 시기였고, 경제발전과 더불어 물질 만능주의가 싹트던 시기였다. 데파트(백화점)에서 옷을 고를 때도 실용성이나 디자인보다 ‘제일 비싼 것’에만 관심 있는 여자. ‘너무 아름다워서’ 친절을 베푼다는 남자에게 홀딱 반해 호텔에서 섹스를 즐기고 동거를 시작하는 여자. 2015년이 아닌, 1930년대를 살고 있는 여자 애순이 거침없이 발산하는 욕망의 스토리는 관객의 예측을 거부하고 조롱한다.

파격적인 소재와 여배우 문예봉의 등장만으로도 <미몽>은 화재가 되었다. <미몽>에서 애순의 앙칼진 목소리는 남자 변사가 흉내낼 수 없는, 주인공 애순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변사의 해석 없이도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캐릭터를 파악할 수 있게 되자, 조선인들은 유성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한국 근대무용의 시조 조택원(미몽). / 경향자료

가부장적 권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성
결국 재벌인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고 강도짓을 계획하던 사기꾼의 욕망은 애순의 신고로 처벌을 받는다. 남자의 실체를 알게 된 애순은 ‘거침없이’ 경찰에 신고한다. 조금 전까지 살을 맞대고 동침하던 남자에 대한 연민의 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부도덕한 남자들에 비해 부도덕한 애순이 받는 처벌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애순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영화 전반부에 암시되어 있다.

영화는 ‘새장에 갇힌 새’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다음 숏은 방에서 화장을 하는 애순과 신문을 보는 남편이 등장한다. 남편은 근엄한 자세로 앉아서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하라’며 애순에게 훈계를 한다. 하지만 애순은 남편에게 등을 돌린 채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반항한다.

“나를 가두어두지 그래요? 난 조롱에 든 새는 아니니까요!”

남편에게 훈계를 듣고서도 새 옷을 사러 가겠다며 거울을 밀쳐내는 애순의 행동은 가부장적 권위에 맞서는 ‘반란’이다. 그런데 밀어낸 거울은 금방 제자리로 돌아와 바로 앞의 애순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인 남편의 얼굴을 비춘다. 거울의 ‘원점회귀’ 장치는 감독이 의도한 매우 중요한 ‘씨뿌리기’라 할 수 있다. 애순이 결코 가부장적 관습의 굴레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의미가 전제된 ‘복선’인 셈이다.

그래서 애순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은 비약적이고 작위적이며 개연성이 없다. 무엇이 애순을 억압해 마침내 가출에 이르게까지 했는지, 영화는 원인을 보여주지 않는다. 애순이 벗어나려는 공간은 조선 후기 가사에 자주 등장하는, 숨막히는 가부장적 공간이 아니다. 시댁 식구가 없기에 벙어리 3년,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을 강요받지도 않고, 난봉꾼 남편이 백마금편(白馬金鞭)으로 다니면서 씨앗년(첩)을 불러들이지도 않는다. 궁핍한 생활고가 그녀를 괴롭히는 공간은 더욱 아니다. 한마디로 고가의 옷을 남편의 허락 없이도 살 수 있는 부유층의 안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애순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무책임하게 내팽개친 채, 욕망의 도시로 유유히 걸어나온다.

모든 결단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 8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으로 봐도 부자연스러울 만큼 애순은 자신의 욕망을 좇아 질주한다. 훈계하는 남편에게 “그럼, 살림살이 잘하는 사람하고 사시구려!” 하고 쏘아붙인 뒤 데파트로 쇼핑을 나서는 여자다. 그리고 엄마를 따라가겠다는 딸에게도 “얘가 미쳤나!”하고 쏘아붙인다. 그야말로 막나가는 여자다.

<미몽>을 상영할 당시, 애순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남녀 할 것 없이 손가락질을 하며 야유를 쏟아냈다고 한다. 심지어 “저런 년은 죽여야 돼!”라고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는 남자 관객들을 극장 직원이 제지해야 하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해서 극장 안의 열기는 그야말로 뜨거웠다는 기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몽>은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영화 미몽에서 문예봉. / 경향자료

한국의 신무용 ‘영화 속의 무용 공연’
<미몽>은 1938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영화제에 출품되었는데, 관람객 인기투표에서 유성영화 33편 중 8위를 기록했다. 가부장적 잣대로 애순의 자살을 요구하는 남성들도 속으로는 요염한 여배우 문예봉의 연기에 빠져들었을 것이고, 여자들이 애순처럼 행동하는 시대가 곧 올 거라는 불안감과 분노가 동시에 작용하면서 극장 주변에 모여든 ‘가부장’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 관객들은 어땠을까? 과소비에다 남편 몰래 애인을 사귀는 막돼먹은 애순을 보면서 겉으로는 분기탱천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그동안의 억압에 대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대리만족의 쾌감을 느꼈을 것이고,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는 애순에게 부러움도 느꼈으리라.

동거남을 신고한 뒤 애순은 남자 무용수의 무용 공연을 관람한다. 영화에서 무용가 조택원의 공연은 놀랍다. 남성의 몸으로 섬세함과 육체의 관능적인 매력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춤은 눈을 뗄 수 없다. 건강한 젊은 남성의 근육의 움직임이 얼마나 관능적인지 흐린 영상을 통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애순이 한눈에 반할 만큼 신선한 충격이었다. 조택원은 최승희와 함께 한국 근대무용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의 제자였으며, 최승희가 월북하면서 두 사람의 교류는 끊어졌다고 전한다. 당시 한국의 신무용을 접할 수 있는 ‘영화 속의 무용 공연’은 보는 재미를 더해 준다.

택시를 타고 젊은 무용수를 쫓아가는 대목에서 내러티브의 비약성은 극에 달한다. 애순은 자신의 욕망을 향해 미친 듯 질주한다. ‘돈’과 ‘남자’만 쫓아가는 애순. 그녀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영화는 여전히 말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그 욕망의 끝이 파멸이라는 것만 보여주기에 급급하다.

30년대 조선의 부인이 무용수를 쫓아 택시를 타고 질주하는 모습은 아이돌 스타를 온종일 쫓아다니는 요즘 청소년 ‘사생팬’보다 더 열정적이다. 하지만 무용수를 뒤쫓으며 과속하던 택시는 끝내 교통사고를 내고 만다. 그런데 이런 억지스런 우연이 또 있을까. 그 택시에 치여서 목숨이 위태로운 여학생은 바로 그녀의 딸 정희였다. 이때부터 애순은 갑자기 모성애를 발휘한다. 극도의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애순은 처절하게 딸의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 극약을 먹고 죽음에 이른다.

이 영화가 경기도 경찰부에서 제작 지원한 조선 최초의 ‘교통영화’라는 점을 알면 누구나 웃음을 터뜨린다. 뜬금없이 나와서 의아했던 여학교에서의 교통교육 장면, 주인공의 자살과 연관된 딸의 교통사고 장면은 ‘교통영화’로서 최선을 다하려 애쓴 감독의 노력이 선명한 부분이지만, 웃음은 참기 힘들다.

욕망을 향해 질주한 여자 ‘죽음의 자장가’
근대 조선도 발전하고 영화 기술도 발전했지만, 1930년대 사람들의 사고는 그에 따라가지 못한 채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의 틀 속에 갇혀 있었다. 딸의 사고에 대한 깊은 죄책감 때문에 애순이가 딸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며 독약을 마시는 결말은 영화 전반에 묘사된 애순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어서 감정이입이 어렵다. 때문에 애순이 마시는 독약은 그 시대가 애순에게 내리는 사약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 부제가 ‘죽음의 자장가’인 것을 볼 때, 감독의 의도는 처음부터 이 ‘막돼먹은 애순씨’를 처단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죽음의 자장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애순은 딸 정희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카메라는 자살을 시도하는 애순의 모습을 몽환적으로 그려낸다. 그녀의 주검은 속죄라도 하듯 남편의 ‘발밑’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택시를 타고 질주하는 애순의 눈에 비친 경성의 모습은 화려하다. 자동차의 경적도 꽤 들려온다. 영화는 근대의 상업경제 속에서 자본의 힘이 급부상하는 시기에 예쁘게 화장하고, 남편에게 할 말 다하며, 가장 비싼 옷을 거리낌 없이 사고, 정부와 호텔에서 섹스를 즐기며, 더 멋진 남자가 나타나면 또 최고 속력으로 따라가는 그야말로 ‘막돼먹은 여성’을 보여준다.

그녀가 집을 떠나서 누렸던 생활은 호화롭고, 자유로우며, 다소 세련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질 나쁜 일탈행위일 뿐이며, 끝내 사고를 내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결국 브레이크가 없는 욕망은 충돌을 거쳐 파멸에 이르는 것이다. 근대화된 조선에서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주체적인 여성상을 긍정적으로 그려 주기를 바란 기대는 끝내 ‘미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문예봉. 그녀만이 1934년에 조선에 ‘너무 일찍’ 태어나버린 애순을 연기할 수 있었다. 1935년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에서 춘향이로 열연한 문예봉은 1948년에 월북하여 최초의 공훈배우, 인민배우로 사랑받았으며, 1980년에 북한영화 <춘향전>에 ‘대부인’(이몽룡의 어머니) 역으로 돌아와 마지막 연기를 펼쳤다. 1999년 3월 26일, 82년의 생을 마감한 문예봉을 추억할 수 있는 영화 <미몽>은 유튜브와 국립영상자료원에서 볼 수 있다.

<박상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