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정치인은 마술사와 추리소설가를 닮았다

“마술사, 추리소설가, 그리고 사업가, 군인, 정치가는 예로부터 ‘사람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미스디렉션의 달인이었다.”

오랫동안 추리소설을 찾아 읽다보니 아무래도 처음 접하던 시절과는 좀 달라진 것 같다. 출간되는 책이 많지 않던 시절에는 닥치는 대로 뭐든지 읽었지만, 요즘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나오는 바람에 소수정예 선택의 독서가 되었다. 경력이 좀 쌓이다 보니 어떨 때는 작가가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뻔히 짐작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무심한 듯 깔려 있는 복선에 허를 찔릴 때도 많다. 바짝 정신 차리고 읽어도 속아 넘어가는 것, 결국 이것이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인 셈이다.

‘후더닛’(Whodunit), 즉 ‘누가 범인인가?’를 밝히는 추리소설은 대개 내용의 대부분을 주인공의 수사 과정이 차지한다. 살인이 벌어졌다면 동기가 무엇인가,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가… 등의 기본적인 추리를 거쳐 증거를 찾아가면서 사건이 해결된다. 하지만 추리소설이 이처럼 따분하게 구성되어 있다면 차라리 신문을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훌륭한 작가는 독자의 주의를 한쪽으로 돌려놓고 다른 쪽에서 뭔가 깜짝 놀랄 일을 벌여놓는다.

훈제한 청어

소설을 읽는 독자의 생각은 자유롭다. 책을 읽는 동안 누구도 의식의 흐름을 속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느 사이에 독자의 생각은 작가의 손안에서 휘둘리곤 한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작가의 실력에 달려 있다.

이런 것을 해당 분야 용어로 표현하자면 ‘훈제한 청어’(Red Herring), 혹은 ‘미스디렉션’(misdirection)이라고 하는데, 사전을 찾아보면 ‘사람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대개 사람은 어떤 자극(소리나 빛)이 있는 쪽으로 눈이 쏠리고, 평범한 움직임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당연하다 생각하게 되면 주의력이 흐려지는 것이다. 제프리 디버는 <사라진 마술사>(2003)를 통해 미스디렉션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혀 의심스럽지 않던 사람이 범인
작가가 독자를 고의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영국의 추리소설가 H.R.F. 키팅은 <추리소설 쓰는 법>(1986)에서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독자를 속이고 눈앞에 실마리가 제시되고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을 제공하면서 그것이 독자와 수수께끼 풀이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딴 속셈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일이다.’

독자가 그럴 듯하게 여기도록 하려면 무척 정교한 솜씨가 필요할 것 같지만,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 중 하나가 “000는 예전에 죽었다”고 말하면 독자는 000라는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대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미스디렉션은 ‘매우 수상해 보이는 인물을 수사관이 한참 쫓아갔는데 범인이 아니었고, 알고 보니 전혀 의심스러워 보이지 않던 사람이 범인이다’라는 것이다.

다만 이런 미스디렉션도 과유불급이다. 탐정이 자꾸만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그 사이에 계속 피해자가 늘어나서 유력한 용의자가 거의 없어진 뒤에야 범인을 밝혀낸다면 과연 그를 명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생긴다. 사실 극단적인 미스디렉션은 꽤 오래전에 읽은 제목과 저자도 잘 기억나지 않는 소설에서 본 일이 있다. 어느 호텔에서 여성이 살해되자, 치정 문제로 추정하고 주변 사람들을 상대로 열심히 수사한다. 하지만 결말까지 몇 페이지 남지 않았을 때 밝혀진 범인은 그때까지 이름 한 번 언급되지 않았던 호텔 직원으로, 동기도 없는 우발 범죄였다는 것. 혹시 이 소설을 읽고 추리소설이 이런 것인가 하고 질색했을 독자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 안타까울 정도이다.

(왼쪽부터)존 볼, 클레이튼 로슨. 마술을 보여주는 아와사카 쓰마오.

마술사이자 유명 추리소설가
소설에서의 미스디렉션 기술은 마술사의 기술과도 비슷한데, 실제로 마술사로서의 실력을 갖춘 유명 추리소설가는 세 명 정도 꼽을 수 있다. 젊은 시절 일러스트레이터, 아트 디렉터로 활동했던 클레이튼 로슨은 두 명의 마술사 탐정을 창조했다. 그의 첫 번째 추리소설인 1938년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이라는 작품에서는 ‘위대한 멀리니’라는 마술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멀리니는 5대에 걸친 서커스 집안 출신으로 뛰어난 마술사이자 마술 도구를 파는 상점도 운영하는 인물이다. 한편 로슨은 스튜어트 타운이라는 필명으로 또 다른 마술사 탐정 돈 디아블로가 등장하는 소설을 펄프 잡지에 발표하였다. 돈 디아블로의 본명은 니콜라스 알렉산더 후딘으로, 그는 초자연적인 범죄와 맞서 싸운다. 멀리니와 돈 디아블로의 창조자 클레이튼 로슨 역시 마술에 관심이 많아 50여 가지에 이르는 마술 트릭을 고안했으며, ‘위대한 멀리니’라는 예명으로 무대에 올랐던 아마추어 마술사이기도 했다.

추리소설에 백인 이외의 주인공이 드물던 1960년대 미국에 새로운 모습의 흑인 형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밤의 열기 속에서>(1965)에서 첫선을 보인 버질 팁스는 당시까지의 인종적 편견을 벗어난 지성을 갖춘 인물로 화제를 모았다. 팁스를 탄생시킨 작가 존 볼은 기자 출신이자 한때 부보안관으로도 근무했으며, 젊은 시절에는 준 프로급 마술사로서 활동했다. 1930년대에 자크 모린텔, 하우더지 등의 예명으로 활동한 그는 당시 마술 관련 잡지의 인명록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을 정도였다.

존 볼이 1977년 일본을 방문해 숙소인 호텔 로비에서 일본 관계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인사를 마치고 명함을 교환할 때, 그는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올리더니 공중에서 자기의 명함을 꺼내고, 잠시 후에는 그 명함을 허공에서 사라지게 했다. 모두가 감탄하고 있었지만 그 트릭을 간파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성냥을 꺼내 놓고 바꿔치기 마술을 펼쳐 존 볼의 감탄을 자아냈다. 마술 솜씨를 보여준 인물은 추리소설가 아와사카 쓰마오로, 제법 알려진 마술사이기도 했다. 앞에 언급한 미국 작가들이 예명을 썼던 것과는 달리 본명(아쓰카와 마사오)의 글자 순서를 뒤섞은 애너그램으로 만든 필명을 썼는데, 그의 본명을 딴 마술 상이 1989년 제정되었다. 생전에는 그가 직접 심사했으며 수상자들은 대부분 현역 마술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아와사카 쓰마오는 산케이신문에 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한 일이 있는데, 미스디렉션을 다룬 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마술사, 추리소설가, 그리고 사업가, 군인, 정치가는 예로부터 미스디렉션의 달인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대부분은 자유로운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

1970년대에 쓴 글이지만, 지금 봐도 공감이 가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추리소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