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진보대법관에 대한 짝사랑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박보영 대법관은 취임하면서 소수자를 대변할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박 대법관의 판결을 보면 보수적 색채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성향을 밝힌 적도 없고 ‘소수자의 몫’으로 임명된 것도 아니었다. 호남 출신에 비서울대 출신 여성이라는 이유로 막연한 ‘기대’를 받았던 것이다. 소수자를 대변할 대법관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런 인물을 가려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달 17일 퇴임하는 신영철 대법관의 후임 대법관이 이르면 이번주 결정된다. 이를 위해 지난주 후보추천위원회에서 후보를 내놓았다. 강민구 창원지법원장, 박상옥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 한위수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다.

/ 이상훈 선임기자

모양새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제청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수용하는 식이다. 하지만 제청 발표에 앞서 청와대와 대법원이 의견을 조율한다. 근본적으로는 추천위 명단부터 법원행정처장과 법무부 장관을 통해 두 사람의 의사가 정밀하게 반영된 것이다.

당장 법원 안팎에서는 후보자가 보수 일색이라는 반발이 나온다. 하지만 정확히 누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비(非)서울대, 여성, 비(非)법관 출신을 뽑으라는 말만 할 뿐이다. 마치 그런 조건이 진보나 다양성을 담보라도 하듯이.

그런데 그런 인물이 현재 대법원에 대법관으로 있다. 하지만 그가 내린 판결에 대해 외부에서는 보수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으며, 내부에서는 생각을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도대체 대법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박보영 대법관 | 박민규 기자

전임 여성 대법관들과 출신부터 달라
“저는 다수결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다수의 그늘에 묻혀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사법부의 사명을 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법정 안팎에서 만난 사회적 약자, 소수자, 여성, 가족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법적 해결책을 고민해 보겠습니다.”

헌정사상 세 번째 여성 최고법관인 박보영 대법관은 2012년 1월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단어 하나하나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호남 출신, 한양대 졸업, 이혼 경력, 변호사 생활을 거쳐온 ‘소수자’ 대법관이기 때문이었다.

전임 김영란·전수안 대법관은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남편은 검사와 의사였다. 대법관을 이론적으로 보좌하기 때문에 핵심 엘리트들만 뽑힌다는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이라는 것도 판박이다. 여성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이력에서 진보적인 색채를 찾기 힘들었다. 그런 두 사람도 진보적인 판결로 대법원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박보영 대법관은 전임 여성 대법관 두 사람에 비해 출신 성분부터가 달랐다. 지역도, 학벌도, 법조경력도, 결혼생활도. 박 대법관에게 소수자를 대변하는 판결을 기대하는 것도 크게 무리가 아니었다. 일부 언론은 취임식에서 치마가 아니라 바지를 입었다며 ‘대법원 관례 파괴… 판결서도 소수자 대변 예상’이라고 보도했다.

사람들이 틀렸다. 언론도 틀렸다.

임기 6년의 절반을 넘긴 2015년 1월 현재 박 대법관은 보수적 색채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의 판결에 해고노동자, 무국적 재외동포 같은 소수자들이 분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박 대법관은 취임식에서 약속했던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 서지도,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주지도 않았다.

판결을 보자. 2014년 11월 대법원은 쌍용차 해고무효 사건에서 복직을 결정한 항소심을 뒤집어 노동자 패소로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2009년 2646명이 해고되고 2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들어 죽어간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주심이 ‘사회적 약자의 법적 해결책을 고민하’겠다던 박 대법관이었다.

1년 전인 2013년 12월 대법원은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동포 3세 정영환씨가 한국 정부의 입국 거부를 취소해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지구촌동포연대는 “일본 정부의 차별과 탄압에 맞선 수만명의 동포들을 상대로 고국의 사법부가 또다시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댄 부끄럽고 치욕스런 날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역시 주심은 박 대법관이다.

하나 더 있다. 2012년 9월 대법원은 경찰이 논란 속에 불심검문을 재개한 지 열흘 만에 불심검문에 불응하고 저항한 시민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로 판단해 인천지법에 돌려보냈다. 판사 출신 서기호 정의당 의원은 “불심검문에서 필요한 범행의 경중, 상황의 긴박성 등에 대해 재량권을 지나치게 확대시켰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이 사건의 주심도 박 대법관이다.

시민사회에서 “박 대법관이 배신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소수자 보호’ 약속 안 한 대법관 없어
“박보영 대법관은 누구의 기대를 배반하지도, 사람이 변하지도 않았다.” 대법원 사정을 잘 아는 법조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박 대법관이 취임식에서 밝힌 정도의 얘기는 대법관이라면 누구나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사법부를 입법부나 행정부와 달리 다수결로 구성하지 않는 이념부터가 소수자 보호다. 법과대학 신입생이 배우는 사법의 이념이다.

박 대법관과 같은 날 취임한 엘리트 법관 출신 김용덕 대법관도 “재판은 사람과 사회에 대한 따뜻한 애정에서 출발해야 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형평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역대 대법관 중에서 소수자 보호를 약속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런데 쌍용차 판결 직후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 소속 변호사 15명이 성명을 냈다. “박 대법관은 여성, 비서울대 등의 이력으로 이른바 ‘소수자’ 몫으로 임명됐다. 그럼에도 이번 판결에서는 소수자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찾아볼 수 없다.”

소수자 몫?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소수자 몫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있지도 않을 뿐더러, 제청권자인 대법원장이나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명색이 변호사들이 “당신이 여성이고 비서울대에 변호사 출신, 심지어 이혼까지 했는데, 왜 그러냐”고 박 대법관을 윽박지른다. 변호사들도 박 대법관의 ‘스펙’만 보고 소수자 보호를 하겠거니 착각한 것이다.

박 대법관을 아는 판사들은 “박 대법관이 자기 신념대로 재판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대법관이 뭐가 무서워서 자기 생각과 다른 결론을 내겠느냐. 오히려 근거도 없이 ‘소수자 몫’이라고 올가미를 씌워서 소신을 바꾸도록 요구하는 게 맞느냐”고 했다. 이들은 “우리라고 동료 판사들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해도 대체로 어떤 성향인지는 안다. 그리고 그 정도는 임명권자(인 청와대)도 파악을 하고 임명장을 주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지난 1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회의에 앞서 위원 10명이 양승태 대법원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여기에 ‘비밀’이 있다. 대법원과 청와대가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제청하고 임명하는 사이에 언론과 시민들은 눈에 보이는 원시적 스펙트럼에만 매달리다 엉뚱한 짝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뒤늦게 ‘속았다’고 붉으락푸르락하며 질질 짜봐야 아무 소용없다.

대법원 인사에 정통한 법조계 관계자는 “시민사회에서 대법관의 다양성을 요구하면서도 속속들이 모르니 표면적인 다양성만 요구하는 데 그친다”고 말했다. 서울대·남성·50대라는 용어를 때마다 들이미는 것도, 박보영 후보에 대해서는 덮어놓고 환호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돼 이른바 진보대법관으로 불렸던 ‘독수리 5형제’의 면면을 보면 경기(여)고를 졸업한 사람이 4명, 서울대 법과대학 출신이 4명, 법관 경력뿐인 사람이 4명, 재판연구관 출신이 4명이다. 이런 조합은 법원에서도 쉽게 찾기 힘든 최고급 엘리트 모임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이들에 대한 정보와 성향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임명한 것으로 짐작된다.

대법관 취임 이후 박보영 대법관의 성향에 대해 현직 판사 등 법조인들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서울고법 관계자는 “쌍용차 사건을 비롯해 특별히 알려진 사건 이외에, 전원합의체 결론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여성문제를 제외하면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그나마 일관되지도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원합의체 판결을 분석해 보면 대체로 다수의견에 가담하고 있어, 설득을 당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으로 짐작된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관이 논리력과 설득력이 모두 있으면 자기 주장을 결론으로 만들어내고, 논리력은 있지만 설득력이 없으면 자기 한 표로 남는 것이고, 둘 다 없으면 다수의견의 거수기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관들의 세계도 관계다. 그들도 (다른 사람의 의견과 충돌해) 관계가 틀어지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 논리로 무장한 투사만이 전합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박 대법관이 초기에는 (대법관 4명이 합의하는) 소부에서 주심을 맡은 경우에도 자기 결론을 관철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고법 관계자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했다. “소부가 보통 주심의 의견대로 진행되지만 다른 재판관들이 한마디라도 지적하면 결정이 미뤄지고 한 번 더 그러면 자기 결론을 포기한다”고 말했다. 연구관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대법관이 자기 이론이 없으면 버텨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법원 로비에서 보이는 대법정과 정의의 여신 ‘디케’. | 이상훈 선임기자

법관 성향 모르고 표면적 다양성만 요구
이런 현실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다른 사람, 성향이 다른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법원 내부의 바람이다. 법원 관계자는 “여성 대법관이라면 성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소수자에 대한 인식을 다른 영역으로 확대할 가능성이 큰 것이 사실이고, 지방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면 서울에서 나온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소수자를 보호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뽑을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호해온 사람’을 뽑으라는 것이다.

소수자를 대변해온 사람이라도 대법원에서 이론가들에게 둘러싸이면 제대로 뜻을 펴기가 힘든데, 막연히 그럴 것 같은 사람이라고 짐작해놓고 뒤늦게 ‘배신’ 운운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아낼 능력도 없으면서 ‘법관·서울대·남성·50대는 불가’라고 피케팅만 하고 있다”며 “외피만으로 보고 결정하는 간편추론(heuristic)에 불과한 구호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근거를 가지고 후보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적절한 대법관 후보를 찾아내거나 알아내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청문회 절차의 강화 등이 꼽힌다. 현행 국회의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는 하루에 불과하고 내용도 단순한 도덕성 검증이 대부분이다. 위장전입·부동산투기·논문표절 정도를 묻고는, 현재 진행 중인 주요 사건에 대해 묻는 식이다. 도덕성에서는 공직에만 있던 판사 출신이 변호사나 교수들에 비해 한결 유리하다. 진행 중인 재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모른다고 하면 끝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관 후보가 청문회에서 논란이 되도록 말을 하겠느냐.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가능한 한 톤을 낮춰서 하지 않겠느냐. 지나온 세월이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지 그날의 몇 마디 말이 사람을 드러내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다른 관계자도 “도덕성에만 집중해 작은 흠결까지 잡아내려는 현재 청문회 분위기에서는 성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대법원에 보내는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했다.

도덕성 중요하지만 성향 파악도 중요
미국에서 연방법원 판사가 되려면 미국변호사협회(ABA) 연방사법위원회의 검증부터 거친다. 15명의 위원들은 후보자를 검증해 세 가지 영역에서 판단한다. 판사로서의 자질, 전문적인 능력, 청렴함이다. 후보자는 물론 주변의 사람도 인터뷰한다. 이 단계를 통과하면 상원 법사위원회의 청문회가 기다린다. 증인을 불러 증언을 듣는 등 강도 높은 검증이 이뤄진다.

마지막 단계는 상원 총회이며 다수결로 인준 여부가 결정된다. 1987년 로버트 보크 연방대법관 후보자는 보수적인 판결과 언행이 문제돼 42대 58로 부결됐다. 주(州) 법원 판사도 비슷해 1999년 한국계로는 처음 판사가 된 대니 전 뉴욕주 판사는 시장에 의해 임명될 당시 청문회만 7차례를 거쳤다. 주 판사의 경우 현재는 대부분 선거로 선출된다.

우리나라는 추천위원회부터 통과의례에 불과할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2011년 제도화된 후보추천위원회는 10명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7명이 법조인이다. 선임대법관, 법원행정처장, 법무부 장관, 대한변호사협회장,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 이사장, 대법관이 아닌 법관이며, 나머지 3명은 학식과 덕망이 있는 비법조인으로 채운다. 이번에는 김종인 전 국회의원, 김자혜 소비자시민모임 회장, 조대현 KBS 사장이었다. 대법원장이 직접 구성하도록 돼 있는 데다가 법조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어 추천위부터 다양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실제 추천 단계에서 대법원장의 의사가 법원행정처장, 대통령의 의중이 법무부 장관을 통해 반영되고 관철되는 게 일상적이다.

더구나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자를 제청하는 특이한 구조이기 때문에 대법원이 후보자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내놓지 않는다. 만에 하나라도 후보자가 낙마할 경우 제청자인 대법원장에게도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정보조차 제공되지 않는 상황에서 후보자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 제청 제도는 1972년 유신헌법에서 생겼는데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대법관의 정치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 의무를 좀 더 전향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나라는 공무원의 정당 가입을 금지하는 등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걸 금기시하고 있다. 법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대법관에 대해서만 정치적 다양성을 바라는 게 일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 관계자는 “근대 헌법에서 공무원에게 보장하는 두 가지 중립성이 종교와 정치인데, 종교의 중립이 종교를 갖지 말라는 게 아니듯 정치의 중립이 정당에 가입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라며 “판사들에게도 최고의 정치적 행위인 투표는 허용하면서 정당 가입을 금지하는 것은 어색하며, 더 어색한 것은 그런 판사생활을 20년씩 해온 사람들에게 갑자기 다양한 이념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고법원 법관의 정치적 다양성을 요구하려면 주요 후보군인 하급심 판사들부터 정치적 다양성을 보장하고 또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법원에서 ‘임금님 당나귀 귀’는 한두 개가 아니다. 어색하고 이상한 당나귀 귀를 달고 다니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는다면 대법원이 너무 웃기는 거 아닐까.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