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원의 에브리컬처]공공미술관 관람, 어디까지 해봤니

미술관처럼 목덜미 뻣뻣해지기 십상인 곳에서 ‘자, 자, 마음 푹 놓고 얼마든지’ 풍의 여유를 만나도록 하는 의외성은 분명 좋은 미술 작품의 조건 중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딸아이를 낳고 난 다음 몇 달쯤 지났을 때 아내가 산후조리원 동기(그렇다. 이 넓은 세상에는 이런 카인드오브 동기동창도 있다)가 보내준 것이라면서 4.4조의 시조(인가? 아무튼) 한 수를 보여줬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애 엄마

박복혜

이런 건 줄 알았다면
처녀 적에 존나 놀 걸

어쩌면 애 엄마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글일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 글을 마주 부여잡은 우리 부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던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 감흥 절절했다. 작자에게 노벨 시조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면 많은 것들이 불가능해진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 중에는 미술관에서 미술품 관람하기도 들어 있는데, 대체 뭔 소리냐, 우리는 애 낳고 미술관 잘 가기만 했다, 요즘 미술관은 주차도 편하고 유모차까지 대여해주는데, 라고 생각하신다면 다시 앞 문장을 봐 주시길 부탁드린다. 불가능한 것은 ‘미술관 가기’가 아니라 ‘미술품 관람하기’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전경. | 경향신문

관람객에게 축복과도 같은 설치작품
우리 부부도 딸아이를 낳은 뒤 행동반경 및 체력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대한 열심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우리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또는 ‘과천 미술관’)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서식하고 있는지라 그곳도 단골 방문코스 중 하나였는데 당시 아내는 출산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평일 낮, 말 그대로 다람쥐와 아기곰 전시실 놀러와 뒹굴며 노니는 평화로운 시간에 미술관을 거닐 수 있었다. 덕분에 딸아이는 데이빗 호크니의 거대 풍경화가 전시된 중앙홀에서 <스타트렉> 시리즈에 그대로 갖다 써도 손색없을 장구한 외계어 연설을 원 없이 해볼 수 있었다.

평상시라면 나부터 즉각 저지했을 이런 기초매너 문란행위가 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나, 관람객이 오로지 우리 가족 세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평소 그림 쪽으로 코만 내밀어도 방사능 누출 막듯 몸 던져 저지하던 미술관 직원들도 웃으며 너그럽게 보아주었다. 혹시라도 저 멀리 어딘가 우리의 시야가 미치지 않았던 곳에서 눈살 찌푸리고 계셨던 관람객이 계셨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린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요. 다람쥐와 아기곰 말고는.

그러나 아내의 출산휴가가 끝나고 미술관 투어가 주말-서울시내로 한정된 뒤엔 사정이 사뭇 달라졌다. 특히 삼 모 기업이 운영하는 한남동 소재 미술관에서가 압권이었다. 우리가 야심차게 노리고 갔던 특별전시에는 딸아이의 외계어 연설을 허용하기엔 너무 많은 관객(즉 한 명 이상)이 있었고, 하여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계단 마니아인 딸아이를 따라 하얀 대리석 깔린 미술관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리는 것뿐이었다. 뭐, 딸아이가 무척 즐거워했고 덕분에 우리도 즐거웠으니 그걸로 됐지만 그래도 그날 밤 꿈에 그 대리석의 기기묘묘한 무늬들이 고스란히 나왔던 것은 좀….

그런 이유로 얼마 전 오랜만에 짬을 내 들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또는 ‘삼청동 미술관’)의 중앙홀에 설치돼 있던 아르헨티나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설치조각 ‘Port of Reflections’는 정말이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이 작품은 조각배들이 떠 있는 작은 항구의 풍경을 물그림자까지 모두 조각으로 만들어놓은 꽤 재치 있는 작품인데, 작품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이 작품에서 가장 멋졌던(이라기보다는 고마웠던) 대목은 관람객들이 지하층인 ‘물 밑’으로 들어가서 1층인 ‘수면’ 쪽을 올려다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는 점이었다.

그 ‘물 밑’에 해당되는 거대 공간의 벽과 바닥 전체에는 까만 카펫이 깔려 있어, 관람객들은 신발을 벗은 채 경보음 걱정 따위 없이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앉고 눕고 굴러도 아무도 저지하지 않는다. 심지어 바닥에 배를 깔고 어푸어푸 소리를 내며 허공 속을 헤엄쳐도(실제로 그랬다. 나 말고 딸아이) 다들 다사롭고 정겨운 눈길을 보내준다. 우리 같은 ‘애 엄마’ 관람객들에게는 그야말로 축복 같은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작품제목 번역의 허세는 아쉬움
이 작품 바로 옆에는 ‘청소년과 어린이는 입구에서만 관람 가능’이라고 못 박은 또 다른 설치작품이 있었는데. 뭐, 물론 설치미술이 키즈카페 인테리어야 아닌 마당에 접근성으로 그 가치를 논하는 것은 지극히 바보스런 일임에 틀림없겠으나, 그래도 ‘금 넘어오면 꼬집을 거야!’라는 듯 신경질적으로 선을 그어놓은 작품보다는 이쪽에 훨씬 호감이 가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미술관처럼 목덜미 뻣뻣해지기 십상인 곳에서 ‘자, 자, 마음 푹 놓고 얼마든지’ 풍의 여유를 만나도록 하는 의외성은 분명 좋은 미술 작품의 조건 중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과 관련해서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Port of Reflections’이라는 작품 제목의 번역이었다. reflection의 사전적 의미로 보거나, 작품의 내용이나 분위기로 보거나, 맥락으로 보거나 이건 아무래도 ‘물그림자의 항구’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좀 더 무게를 잡는다면 ‘반영(反影)의 항구’까진 모르겠지만, ‘reflections’를 굳이 ‘대척점’이라는 붙임성 제로의 단어로 번역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해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보유하고 있는 모든 영한사전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reflection의 뜻으로 ‘대척점’을 적어놓은 사전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글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인간이니만큼 이런 문제에 있어 나름 집요한 구석이 있는지라, 이 단어가 등장해야만 했던 단서를 찾기 위해 결국 국어사전까지 뒤져보았다. 그 결과 ‘대척점’에, 요컨대 ‘지구 정 반대편’이라는 뜻이 있다는 걸 찾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뭐, 작가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단어가 등장할 알리바이가 간신히 성립하긴 한다만, 그럼에도 이 단어의 사용은 도무지 수긍하기 어려웠다. 이 작품의 테마가 ‘지구 정반대편’에 있지 않은 마당에 말이다.

자, 이 대목에서 뭘 그리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그래, 좁쌀스럽게, 라고 질타하실 분들 계시리라 믿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작품 하나만 놓고 봤다면.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물그림자’를 굳이 애써 ‘대척점’으로 바꿔놓는 이런 경우가 꼭 이뿐일까 싶어 한마디 적었다.

한동원의 에브리컬처

법원 판결문에서부터 아파트 관리사무소 공고문까지, 이런 카인드오브 허세를 언제 어디서나 넘치도록 보고 있는 우리다. 적어도 공공 미술관 같은 곳에서만큼은 참아주면 안될까.

<한동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