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뭐부터 하지” 왜 정리가 안 될까?

놀고 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내 마음대로 한다. 하지만 일은 다르다.

얼마 전 <미루는 습관 버리기>라는 책을 샀다. 굳이 이런 데에 돈을 쓴 이유는 내가 일을 미루기 때문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집안 청소와 설거지를 미루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장부 정리도 미루다가 월말에 숨 돌릴 틈도 없이 허덕이고 사무실 청소도 주말이면 슬그머니 미룬다. 그러다보면 결국 만천하에 구멍이 공개되어 하하하, 하려고 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하하하 같은 변명을 하며 퇴근 시간을 넘기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그런 의도로 책을 구매한 건 아니었지만, 책을 읽다보니 세상에 미루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져서 나는 도리어 안도하였다. 심지어 이 미루는 종족들이란 패턴까지 비슷했다. 나가야 될 시간이 되면 갑자기 들뜬 화장이 눈에 들어오고 머리를 말아야 할 거 같고 청소를 시작하거나 고양이 털을 빗기 시작한다. 영수증 정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자마자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멍하니 페이스북 화면을 보고 괜히 커피를 탄다. 내 상사는 이런 내 습관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였다.

“넌 너무 산만하더라. 일에 우선순위가 없어 보여.”

감탄하였다. 나는 정말이지 일관된 인간이었다. 우선순위가 없다는 비판은 중학교 방송부 선생님부터 엄마와 운동권 선배를 거쳐 종국에는 구남친까지, 내 삶을 거쳐 간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 하는 말이었다. 체크리스트를 작성해 보기도 하고 다이어리를 꼼꼼하게 써 보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그 말 앞에 서 있곤 했다. 나는 우선순위가 없는 사람이었다.

<미루는 습관 버리기>를 쓴 윌리엄 너스는 미루는 습관이 고착화되는 이유에 대해 “실행을 미룬 일이 그리 큰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라고 써 놓았다. 이 사람 역시 우선순위라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나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내 뇌가 ‘그 우선순위’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사실 집중력이 좋은 사람이다. 몇 년 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카운터 아래에 넷북을 숨겨놓고 영화를 보느라 아무리 손님이 찾아도 몰랐던 순간도 있다. 얼마나 영화에 집중했던지 한참 후에야 카운터에서 벌떡 일어나서 바코드를 찍으면서도 영화 때문에 솟은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물론 손님은 매우 당황했다. 점장에게 들켰다면 집중력은커녕 산만하다고 평가를 받아 해고당했을 것이다.

‘일이 되면 하기 싫다’는 건 자명한 진실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직업은 소설가가 아니라 대학강사였고, 소세키에게 소설 쓰기가 일이 아니라 놀이였다는 건 글 써서 돈 벌 땐 억울할 정도로 부러웠다. 마르크스는 노동이 소외되는 조건 중 하나로 노동과 놀이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꼽는다. 놀이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놀고 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내 마음대로 한다. 하지만 일은 다르다. 나는 규칙도 계획도 정할 수가 없다. 타자의 틀 안에서 결정되는 우선순위를 ‘내 우선순위’로 받아들이길 강요당해야 한다.

취직하기 전 어느 날 혼자 우동을 먹고 동네를 산책하고 골목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SNS에 ‘꿈꾸던 삶이 딱 이 정도였다. 이 시간에 가을 햇빛을 받으며 가볍게 담배를 피우고 동네 산책을 하는. 돈이 이 정도로 없는 것만 제외하면.’이라고 썼다.

그날은 간만에 행복하다고 느꼈다. 나는 시간 속에서 흐르는 대로 자신을 놓아두고 있었고, 하고 싶은 일들 몇 가지를 결정했다. 그때는 ‘뭘 먼저 해야 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가 선연하게 드러났다. 당연히 취직 이후에는 그렇게 자신을 놓아둘 수가 없다. 그랬다간 굶어 죽기 십상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고 세상이 말하는 건 다 죽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아마 내일 아침에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출근해서 멍을 때릴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고 자기계발서를 읽는 무망한 저항을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저항에 잘 못 따라 오더라도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짜 우선순위를 찾기 위해 내 뇌세포들이 안간힘을 쓰는 건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일이 아닌가. 거기다 오늘은 영수증 처리를 미루지 않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으니까.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이서영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회원>

노조 상근하는 소설가. 운동권 환상소설을 쓰다가 굶어 죽을 것 같아서 어느 노동조합에 취직했다. 단편집 <악어의 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