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경제]기술자들-사라진 5만원권, 비자금으로 숨었나

도둑질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 모르게 무엇을 훔쳐간다는 게 여간 머리가 좋지 않아서는 힘들다. 도둑들을 소재로 한 영화를 ‘케이퍼 필름’(Caper Film)이라 부른다. 도둑 중에서도 스마트한 도둑을 다룬다는 점에서 우중충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일반 범죄영화와는 다르다. <오션스 일레븐> <도둑들> <이탈리안 잡>이 대표적이다. <인셉션>이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도 케이퍼 필름 형식을 띠는 영화다.

한국형 케이퍼 필름에 김홍선 감독이 <기술자>들로 합류했다. 지혁(김우빈 분)은 뛰어난 금고털이범이다. 작전설계도 기가 막히게 한다. 구인은 범행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종배는 어떤 보안시스템도 순식간에 뚫을 수 있는 해커다. 이들 세 명은 콤비를 이뤄 철통 보안을 자랑하던 보석상에서 시가 30억원짜리 보석을 턴다. 그런데 보석을 털고 보니 재계의 검은 손, 조 사장 거다. 정치권 진출에 실패한 조 사장은 정치권이 숨겨놓은 비자금 1500억원을 털어 복수를 할 참이다. 이 작전에 3명의 ‘도둑’들을 끌어들인다. 비자금은 인천세관 내 1급 보안구역에 숨겨져 있다. 5만원권 3톤을 감시카메라가 멈춘 40분 안에 빼와야 한다.

조 사장이 털려는 돈은 정치권이 숨겨놓은 비자금이다. 비자금이란 불법적으로 조성해 숨겨놓은 자금을 말한다. 통상 리베이트나 커미션, 회계조작 등을 통해 자금추적이 불가능하도록 흔적을 지운다. 납품가격이나 접대비를 조작하기도 하고 매출을 누락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해외법인이나 지사가 동원되기도 한다.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세운 뒤 이곳을 통해 수출입 물량의 수량이나 가격을 조작해 차액을 비자금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비자금은 통상 떳떳지 못한 곳에 쓰기 위해 조성된다. 정치권에 로비를 하거나 2세나 3세 승계를 위한 종잣돈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혹은 오너가 해외에 재산 축적을 위해 빼돌리는 경우도 있다. 청도 송전탑 반대 주민들에게 뿌렸던 돈봉투도 시공업체가 비밀리에 마련했던 비자금 계좌에서 나왔다.

비자금은 해외계좌나 기업의 차명계좌에 은닉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미술품, 유가증권, 상품권이 활용되기도 한다. 2014년 발행된 상품권은 10조원에 육박했다. 특히 50만원권 고액 상품권은 전년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났다. 상품권은 구매 때 구입자의 신원을 정부에 신고할 의무가 없어 비자금을 세탁하기에 좋다. 현금이 필요하면 시중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팔고 다시 현금화하면 된다. 은행은 2000만원 이상 거래하면 정부에 보고돼 검은 거래를 하기 힘들다.

비자금이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진 사건은 1987년 4월 범양상선의 불법 외화유출 사건 때다. 또 1991년 수서지구 택지를 한보그룹에 특별분양하는 과정에서 정·관계 인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린 수서비리 사건에서도 거액의 비자금이 문제가 됐다. 2007년에는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져 이건희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났다. 삼성그룹의 전직 법무팀장인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그룹의 비자금을 폭로했다. 비자금은 대선정국에 정치권으로 흘러들어 대형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영화 속 경제

비자금은 그 성격상 지하경제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국가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크다. 카자흐스탄은 최근 유가하락으로 위기를 맞자 자국민의 비자금 7000억원을 양성화시키면서 한숨을 돌렸다. 은행에 예치하거나 국가사업에 투자하면 면세를 보장해 양지로 끌어낸 것이다. 조 사장이 인천세관에서 털려고 하는 비자금은 5만원 고액권이다. 1500억원이면 무려 300만 장이다. 시중에 발행된 5만원권의 회수율이 2014년 8월 기준으로 22.7%까지 떨어졌다. 시중에서 실종된 5만원권이 지하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