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논리적인 추리소설, 점술에 기댄 작가들

<대낮의 사각>, <유괴> 등의 작품이 번역되기도 한 다카기 아키미쓰는 점술사의 권유로 소설가가 됐다. 이후 그는 수많은 추리소설을 썼을 뿐만 아니라 <점의 인생론> 같은 일련의 점술 관련 서적을 집필하는 등 점술의 전면적 신봉자임을 밝혔다.

새해를 맞이해서 그런지 잡지를 뒤적이다 보면 ‘신년 운세’ 같은 기사가 종종 보인다. 대한민국 국민 수천만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모호하고 추상적인 내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들어맞으면 좋고 틀리더라도 그냥 재미’로 여기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앞날을 예측한다는 것은 먼 옛날부터 사람들의 소망이었으며 아직도 이루지 못한 기술(?) 중의 하나이다. 물론 기상예보처럼 정확도가 높은 예측이 있고, 충분한 정보와 그것을 활용할 능력이 있다면 정치·경제 등 시사적 전망이나 운동경기 승리 팀 예측도 꽤 높은 확률로 가능하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더욱 궁금해한다. 즉 약혼자와의 궁합이 어떤지, 선거에 당선할 수 있을지 등을 더욱 절실하게 알고 싶은 것이다. 언젠가는 모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될 수도 있고, 범죄 또한 예방이 가능할지 모른다.

소설에서는 이미 이런 미래가 묘사되었다. 필립 커의 <철학적 탐구>에서는 뇌 검사를 통해 선천적 폭력성향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예비 범죄자로 보고 국가적 차원으로 관리한다는 범죄 완전 예방 프로그램이 등장한다. 잘못이라곤 저지른 적 없는 평범한 사람마저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어버리는 제도적 폭력은 범죄 예방이라고는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다.

필립 커의 <철학적 탐구>와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의 원서 표지.

영어권에서는 영적 능력 도입은 금기
이런 과학적 설정을 갖춘 작품과는 달리, 몇 년 전 읽은 제법 유명한 외국 작가의 작품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범인을 추적하게 된 계기가 단지 ‘인상 나쁜 사람’이었을 뿐 그 이상의 별다른 근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관상으로 범인을 잡은 셈이다.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지만 추리소설에서는 독자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벤슨 살인사건>, <비숍 살인사건> 등의 작품으로 1920년대 미국 최고의 인기작가로 군림했던 S S 밴 다인은 1928년 ‘추리소설 작법 20가지 규칙’을 발표했다. 이것은 추리소설을 쓸 때 금기와 필수 조건을 망라한 것이다. 이 중 여덟 번째 항목은 다음과 같다.

“범죄의 문제는 반드시 엄격한 자연법칙에 따라 해결되어야만 한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점술, 심령술, 독심술, 수정구슬 보기 등을 사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독자는 이성적 추리력이 있는 탐정과 머리싸움을 해야 승산이 있는 것이지 영계(靈界)와 경쟁을 한다면 처음부터 승산이 없다.”

탐정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얼굴만 봐도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있다면 논리적 추리라는 과정도 필요 없고 아무런 재미도 없을 터이다. 독자를 위해서 당연히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다 보니 영어권 추리소설에는 점술사와 같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유명한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 쪽을 조사해보면 가끔 보인다. 아마도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타라이 기요시는 우리나라 추리소설 독자들 사이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 그의 직업은 점성술사(탐정 일은 취미)였으나,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사립탐정(점성술이 취미)으로 바뀐다. 괴짜 소리를 듣는 그이지만 의뢰받은 사건은 점성술이 아닌 논리적 추리를 통해 해결한다. 작가인 시마다 소지는 추리소설가로 등단하기 전인 20대 시절 점성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가졌다. 성명학(姓名學)에도 조예가 있는지 여러 후배 추리소설가들의 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일본의 추리소설가 다카기 아키미쓰의 <문실 살인사건> 원고.

이외에도 점술을 신뢰한 일본의 추리소설가가 몇 명 있다. <대낮의 사각>, <유괴> 등의 작품이 번역되기도 한 다카기 아키미쓰가 작가가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는 비행기 제작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가 일본의 패전 후 실업자가 되어버렸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용하다는 점술사를 찾아갔다. 그가 만난 점술사는 관상이 유명한 소설가와 흡사하니 소설, 그것도 장편소설을 쓰면 성공할 것이라고 권했다. 공과대학 출신으로 그때까지 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에게 당혹스러운 권유였다. 하지만 그는 학생 시절 즐겨 읽었던 추리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3주 만에 600장 정도의 장편소설을 완성해 몇몇 출판사에 보낸다. 그의 희망과는 달리 젊은 무명작가의 소설을 출간해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다시 한 번 점술사를 찾아가서 “대가(大家)에게 이 원고를 보내면 인정받을 것이고, 그럼 성공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원고를 깨끗하게 정리해 당대 최고의 추리소설가 에도가와 란포에게 원고를 보냈는데, 란포는 일면식도 없던 이 청년의 작품을 읽은 후 참신한 내용에 감탄하여 출판을 주선한다. 이 작품이 바로 일본 추리소설의 걸작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문신 살인사건>(1948)이다. 여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가미즈 교스케는 최고의 천재 탐정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후 그는 수많은 추리소설을 썼을 뿐만 아니라 <점의 인생론> 같은 일련의 점술 관련 서적을 집필하는 등 점술의 전면적 신봉자임을 밝혔다.

풍수 믿고 집 옮긴 후 대박난 작가들
21세기 들어와서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작가가 눈에 뜨인다. <제노사이드>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은 다카노 가즈아키의 경험은 독특하다. 그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면서 개인적 창작 욕구를 해소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꾸준히 추리소설 공모전에 도전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자신의 운세가 좋지 않다고 여긴 그는 풍수(風水) 공부를 시작해 행운을 불러오는 ‘좋은 장소’로 이사를 갔다. 마침 새 집의 정남향에 신인 공모전인 에도가와 란포 상을 후원하는 출판사가 있었다. 대단히 좋은 징조라 생각하고 다시 새로운 작품을 써서 응모한다. 그리고 에도가와 란포 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연락을 받은 날 밤, 꿈에서 자신을 향해 생글생글 웃는 미야베 미유키(그 해 심사위원을 맡았다)를 보고 그는 수상을 확신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 <13계단>은 2001년의 만장일치 수상작이 되었다.

지난해 <삼분의 일>이 번역된 기노시타 한타도 비슷한 경험을 밝힌 바 있다. 연극계에서 각본가와 배우로서 활동하던 그는 블로그에 글을 쓴 것을 계기로 장편소설에 도전했다. 첫 작품 <악몽의 엘리베이터>를 발표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사카에 거주하던 그는 유명한 점술사에게서 “내년 2월 도쿄로 가면 잘 팔릴 것이다”라는 말에 따라 도쿄로 이사했다. 그 때문인지 데뷔작은 출간 2년 만에 인기를 얻어 영화와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이후 발표한 ‘악몽’ 시리즈는 수십만 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추리소설을 쓴다고 하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것만 같다. 하지만 이처럼 작가들의 엉뚱한 면모와 함께 절실함을 통해 성공한 과정은 오히려 더욱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

새해를 맞이하면서 목표를 세운 뒤 연말쯤 달성에 성공한다면 그 역시 미래 예언이 적중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모든 분이 소원을 성취하는 2015년이 되길 기원한다.

<추리소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