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침묵의 언어로 전하는 ‘필연’

돌에게 말하는 법 가르치기
애니 딜라드 지음·김선형 옮김·민음사·1만2000원

갈수록 겨울나기가 힘들다. 잎 진 나무가 텅 빈 침묵으로 굽어보는 풍경도, 해[年]를 보내고 맞는 이맘때의 의식도 버겁다. 무엇보다 힘든 건 짧아진 빛과 기나긴 어둠이다. 밤이 오면 개흙 같은 허무와 함께 마음은 어둔 진창으로 가라앉는다. 그럴 때 책 읽기는 부시를 치는 것과 같다. 가끔 불꽃이 일지만 불길이 타올라 몸이 따스해지고 주위가 환해지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팔이 저리도록 쳐도 불꽃은커녕 어둠만 깊어지기 일쑤. 작은 불씨라도 얻기 위해 공들여 부싯돌을 고른다. 올 겨울엔 운이 좋다. 단단해서 좀 아프지만 아름다운 스피노자가 있고, 그보다는 조금 말랑하지만 못지않게 아름다운 애니 딜라드를 발견했으니.

매일 두 시간씩 스피노자에게서 무정한 세상을 원망도 기대도 없이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지칠 때쯤 눈을 감고 딜라드를 읽는다. 스피노자도 그렇지만 딜라드도 눈을 감고 읽어야 한다. 눈을 감고 어떻게 책을 읽느냐고 고개를 젓는다면 나는 잠자코 <돌에게 말하는 법 가르치기>를 건네겠다. 그걸 보면 알게 되리라. 세상 어디서는 날마다 돌멩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사내가 있고, 그를 보면서 “하느님도 저버린 섬들 어딘가 절벽 위에 사는 수천 그루 중 한 그루가 되어” 침묵을 향해 기도했던 속 깊은 사람이 있으니, 그를 읽으려면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딜라드는 침묵의 언어로 일식(日蝕)의 전율과 북극의 숭고와 아마존의 필연과 갈라파고스의 자유를 전한다. 그녀가 그리는 자연은 스피노자의 자연과 같아서 내가 아직 버리지 못한 휴머니즘이 들어설 자리가 없고, 그러므로 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나는 그녀처럼 담대하게 자연의 적막을 마주하지 못하며, 밧줄에 목이 감겨 서서히 죽어가는 사슴을 동정 없이 바라보지 못한다. 그녀 덕분에 동정이야말로 모욕임을 깨달은 지금도, 나는 온 힘을 다해 필연을 사는 존재들을 섣불리 동정하고 그렇게 어쭙잖은 내 삶을 변명하려 한다.

그러나 딜라드는 그런 식으로는 변명은커녕 이 어둠의 계절을 견디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속삭인다. 인간 역사의 배경쯤으로나 여겼던 저 불변의 단단한 바위가 생명을 만들고 그 생명의 채찍질을 받으며 새로 태어나거늘, “이 별의 어디에서나 자유가 필연을 에워싸고 꿈틀거리며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어설픈 인간주의로 그 거대한 변화를 어찌 감당하랴.

더욱이 그녀가 전하는 세계에선 인간조차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2년 넘게 걸릴 북극 탐험을 떠나면서 석탄은 겨우 12일치를 챙기는 대신 책은 1200권이나 싣는 순진함, 부상당한 자신 때문에 동료들이 위험에 빠진 걸 알고 얼어 죽기 위해 텐트 밖으로 나가면서 “잠깐 바깥에 다녀오겠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군” 하고 말하는 무모한 품위, 그리고 먹을 것이 떨어져 식인을 감행할 때조차 순은 식기를 챙기는 불가해함까지.

북리뷰

오늘의 경제적 인간과는 닮은 데가 없는 그들, 극한을 산 그들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그것은 죽는 순간에도 필연에 따라 행동하는 족제비의 삶과 다르지 않으니, 나도 이제 딜라드처럼 기도한다. 부디 새해에는 족제비가 제대로 살아가듯이 제대로 살 수 있기를, “모든 것을 파악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맹렬하고 날카로운 의지로 주어진 운명을 선택”할 수 있기를.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