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작은 거인이 된 엉뚱 소녀 임순례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획득하는 영화 작가 임순례. 그는 가족의 ‘무관심한 지지’와 자신의 ‘엉뚱한 기질’이 오늘의 영화감독 임순례를 낳았다고 말한다. “청년기의 저를 외부에서 보면 거의 루저였겠죠. 살은 찌고 미래에 대한 아무 희망도 없고. 그런데 그 시간들이 과연 무의미했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임순례.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이자 꼭 만나고 싶었던 ‘큰 언니’였다. 섬세한 눈빛, 수줍고 귀여운 웃음,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 누구보다 넉넉한 품을 가졌지만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나는 경우를 만나면, 작은 목소리로도 천둥 같은 호통을 칠 수 있는 작은 거인. 그는 우리가 잘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우리 눈에 잘 안 보이는 걸 보고 영상에 담아낸다. 임순례라는 렌즈를 통해서 만나는 사람과 동물들은 우리에게 와서 눈물이 되고, 웃음이 되고, 의미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임순례의 영화는 삶의 이면에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관객에게 말을 건다. 철저히 자료 조사를 하고 물집이 터지도록 발품을 팔아서 영화를 완성하는 완벽주의자이기도 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3류 밴드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건져 올리는 인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임순례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획득하는 영화 작가. <세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남쪽으로 튀어라>, <제보자> 등 한국영화의 대표작들을 꾸준히 만들고 있는 임순례 감독을 만났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제보자> 등 한국 영화의 대표작들을 꾸준히 만들고 있는 임순례 감독. 그는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획득한 영화 작가다. | 이상훈 선임기자

소녀 임순례
상당히 머리가 좋으나 매사에 엉뚱하며 게으른 소녀가 있었다. 학교 교사들의 눈에 비친 임순례의 이야기다. 사실 그 소녀는 엄청난 독서광이었다. 교과서 대신 소설을 읽었을 뿐이다.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과 그의 체험은 고스란히 영화에 녹아서 눈물겨운 인물들을 탄생시켰다. 가족의 ‘무관심한 지지’와 본인의 ‘엉뚱한 기질’이 오늘의 영화감독 임순례를 낳았다.

영화감독의 어린 시절은 뭔가 달랐을 것 같아요.
“집이 너무 가난했어요.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 증상이 좀 있어서 매일 술을 드셨어요. 술에 취하는 밤마다 폭력적인 상황이 벌어지니까 집안이 안정적이지 못했어요. 굉장히 머리가 좋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실 수 있는 분이었는데 무학이에요. 농사짓다가 미군부대 노동자가 됐는데, 아버지가 뭔가를 하려고 해도 영어를 모르고 지적 배경이 없으니까 좌절감을 술로 푼 거 같아요. 아버지는 탈지분유, 초콜릿 같은 건 가져다 주셨지만 영화를 보여주거나 동화책을 사 주진 못하셨어요. 그런데 중학교에 가니까 도서관에 책이 많은 거예요. 세계문학전집을 많이 읽었어요. 셰익스피어, 도스토예프스키 등 이해가 안 되는 것도 막 읽었어요. 수업시간에 교과서 사이에 책을 끼워서 보다가 많이 맞았죠.”(웃음)

맞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겁 없는 소녀였군요. 가족들은 걱정 안했나요?
“그냥 맞았어요. 초등학교 3학년 이후 중학교 때까지 집에서 숙제나 공부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 폭력적인 사람이었어요. 하루 숙제가 구구단을 100번 써오기였어요. 제가 5남매의 막내인데, 언니가 다섯 번, 큰 오빠가 열 번, 작은 오빠가 20번, 나머지는 내가 밤을 새서 숙제를 하는 거예요. 반 애들은 대부분 죽도록 맞고…. 그때 선생님의 요구를 맞춰주느라고 9살짜리가 완전히 피폐해진 거죠. 이후엔 숙제를 내주면 ‘아, 그냥 한 대 맞고 말지 뭐!’ 그랬어요. 우리 가족은 모두 서로 참견도 안 하고 야단도 안 쳐요. 저희 엄마가 ‘너는 왜 노트 사달라는 소리를 안 하냐?’ 하신 게 다예요.”

예술가적 기질은 누구 영향을 받은 걸까요.
“예술을 하신 분은 없어요. 성격은 아버지의 집중력과 감수성, 어머니의 무던함을 닮은 것 같아요. 오빠들은 셋 다 공고를 나왔고, 큰 언니(임순분)는 아주 평범해서 초등학교 성적이 100% ‘미’였죠. 중학교를 안 가고 ‘편물’을 배웠는데 나중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까지 하고 지금은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돼서 전시회도 해요. 오빠들도 손재주가 좋아요. 막내오빠는 그림을 잘 그려서 저 대학원 다닐 때 영화 콘티를 다 그려줬어요. 잠재된 예술적 기질이 조금은 있는 걸까요….”

고등학교 중퇴, 검정고시, 한양대학교 영문과 졸업, 프랑스 제8대학 영화학 석사. 평범하지 않은 과정을 거치셨어요. 고3 때 반 꼴등이 프랑스 가서 석사학위를 따왔다구요.
“중학교 때까지는 수업시간에만 집중을 해도 성적은 최상위권이었어요. 인천 명문 인일여고에 추첨으로 들어갔는데 성적이 막 떨어지더라구요. 그땐 꿈이 없었어요. 결국엔 진학반에 못 가게 됐을 때 충격을 받았어요. ‘안 해서 그런 거지 진짜 잘할 수 있습니다!’ 담임을 졸라서 진학반에 들어갔지만 고3 첫 시험에서 꼴등을 했어요. 선생님들이 공부 못하는 애들은 인간쓰레기 취급을 할 때였어요. 인격적인 대우를 못 받느니 ‘독학을 하자’ 마음을 먹고 자퇴하겠다고 했죠. 저희 가족은 자식의 결정에 대해 간섭을 안 하는 대신 책임도 스스로 지라고 가르쳤어요. 야무진 맘을 먹고 자퇴를 했는데, 늦게 일어나고, 하루에 소설책 한 권 읽고, 놀고먹으니까 살이 막 찌고…. 그런데 저는 아주 행복한 거예요. 딱 2년을 놀았는데 30년 후에 누가 나를 먹여 살려 줄 것인가? 어느날 번쩍 생각이 들었어요. 난 중졸인데… 취직하려면 대학에 가자. 1년 동안 정신 차리고 공부해서 한양대 영문과에 갔죠. 동기들보다 두 살이 많으니까 족보가 애매해서 학생운동에 끼기도 그렇고… 3학년 때부터 주말마다 8편씩 예술영화를 보기 시작했어요.”

지도교수 앞에서 논문을 찢다
프랑스 문화원의 시네마테크에서 유럽 예술영화를 200편가량 보고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대학원 수업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정성껏 쓴 논문은 용납하기 힘든 이유로 세 번이나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지도교수 앞에서 자신의 논문을 찢고 미련을 버렸다. 프랑스로 가서 영화에 미쳐보자는 결심을 하고 1988년 파리로 떠났다. 어학과정을 듣지 않고 영화 자막에 나오는 단어를 기억하거나 수첩에 적어서 사전 찾아보며 독학으로 불어를 공부했다. 제8대학교 영화학과에 입학한 그는 정확히 4년 만에 <미조구치 겐지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학비를 보내준 큰오빠의 묵묵한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부인했지만 상당히 머리가 좋고 집중력이 놀라운 사람임이 분명했다.

귀국과 동시에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 연출부에서 스크립터로 일하면서 영화 제작방식을 체득했다. 그 후 처음 만든 단편영화 <우중산책>으로 1994년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대상과 젊은 비평가상을 받으며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지 않겠다고 학교에서 뛰쳐나온 꼴등 임순례의 15년 후 모습이다.

단편영화 〈우중산책>은 변두리 영화관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는 노처녀가 느끼는 삶의 공허함을 섬세한 영상으로 담아낸 수작이었다. 1996년엔 첫 장편영화 <세 친구>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평론가들이 주는 넷팩상을 수상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 무소속, 삼겹, 섬세는 꿈을 박탈당하고 사회 밖으로 내쫓긴다. 암울한 그들의 모습을 희미한 조명과 절제된 음악, 움직임이 거의 없는 카메라에 담아낸 독특한 영화를 해외에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첫 상업영화를 찍으면서 실험적 시도를 마음껏 한 감독이 또 있을까. 이후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2001년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특히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명승부를 펼쳤던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실화를 소재로 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그에게 안겼다.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다작(多作)하지 못하는 감독은 오랜 준비과정을 거쳐서 작품을 만들 때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았다.

요즘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서 재개봉 열풍이 뜨거운데요, 저는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다시 보고 싶어요. <세 친구> 개봉 당시에 주인공들이 저랑 동갑이어서 그들에게 깊이 감정이입하는 바람에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을 울었어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한 편의 뮤지컬 같은 영화였어요. 카바레에서 실제 모델들과 합숙하면서 찍은 거 아니에요?(웃음) 그 세계를 살아보지 않고 어떻게 그 정도로 구체적인 묘사를 할 수 있죠? 단란주점에서 알몸으로 ‘아파트’를 부르던 성우의 표정은 지금도 선명해요. 노래방 모니터엔 꿈 많던 고교 시절, 해변을 알몸으로 질주하던 성우의 모습이 나오잖아요. 단란주점의 앵글과 바닷가 롱샷을 대비해서 꿈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준 장면을 보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예요. 섬세한 감정이 담긴 신이 유난히 많았어요. 조안 제트 앤드 블랙하츠의 ‘아이 러브 로큰롤’에서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까지 들을거리도 풍성했고요.
“김응수 감독이 어느날 이 영화의 모태가 된 시놉시스를 써가지고 와서 저랑 정서가 맞을 거라고 권해줘서 찍게 된 영화예요. 서울까지 한 10시간 정도 걸리는 완행열차를 탄 적이 있는데, 남녀 한 쌍이 가까운 거리에 앉아서 내가 알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를 밤새 하는 거예요. 남자 분은 나이트클럽 악사이고, 여자 분은 종업원이었어요.

복잡한 남녀관계에 얽힌 야한 얘기,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인생들의 깊은 비애….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그런 페이소스들이 있는 이야기들이었어요. 거기서 일하시는 분들 취재를 많이 다녔어요. 영업이 끝나는 3시쯤에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면서 밤새 얘기를 듣는 거죠. 그분들도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거든요.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유흥업소 여성들이 5시쯤 일이 끝나면 그 안에서 원맨밴드를 불러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면서 노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심한 일들이 그 안에서 벌어지는 거죠. 그런 것을 겪고 문을 딱 열고 나오면 사람들은 출근을 하고 있대요. 이걸 보면서 자괴감을 느끼는 거예요. 꿈과 현실의 괴리. ‘수안보 와이키키’는 외국의 휴양지 이름을 빌려왔지만 초라한 3류 휴양지로 전락했죠. 음악학원 선생이 성우에게 자신과 동갑인 지미 헨드릭스가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노래를 부를 때, 자신은 베트남에 참전한 남편을 둔 아줌마들이 춤바람 난 카바레에서 연주했다는 대사가 나와요. 결국 하와이와 수안보의 차이인 거죠. 영화에서 이 차이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아저씨가 아줌마로, 삼류밴드가 핸드볼 선수로 바뀐 ‘아줌마판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불리는 <우생순>도 감동이 큰 영화였죠. 문소리씨는 감독님이 너무 혹독하게 여배우들을 훈련시켜서 섭섭했다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어요.(웃음)
“하루 7∼8시간 동안 스피드, 점프력 등 기본기를 다지는 체력훈련을 했어요. 하루에 찍어야 되는 분량이 정해져 있고 빨리빨리 진행해야 하다 보니 여배우라고 배려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모두 여잔데 누구를 특별대우 하겠어요. 모두가 다 공주인데.”(웃음)

영화 <제보자> 촬영을 하면서 박해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임순례 감독. | 영화인 제공

제보자, 임순례가 이렇게도 찍을 수 있구나

약자의 인권·정의·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영상으로 만들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분이십니다. 특히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KARA) 대표로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미안해, 고마워> 같은 동물보호 메시지를 담은 영화도 만드셨구요. 소외된 사람들과 동물에 대한 공감능력이 발달한 배경이 궁금해요.
“인천에서도 굉장히 변두리 마을에 살았는데 일용노동자들이 많았어요. 세 들어 사는 집을 다 합치면 열다섯 명, 스무 명씩 한 집에 살았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부딪히고 살다 보니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깊어요. 제 영화에 주인공이 따로 없는 이유가 그런 삶에는 주인공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가 어릴 때부터 동물을 유난히 좋아했어요. 동네 개, 고양이들을 다 보살피고…. 그런데 어제까지 나랑 놀던 개를 동네 어른들이 몽둥이로 때려서 잡고, 끓여 먹고…. 그게 너무 상처가 된 거예요. 그 아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죄책감이 지금 동물보호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운동가로서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개고기’를 좀 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로 대중을 조금이라도 설득해보고 싶어요. 동물을 배려할 수 있는 사회라면 사람에 대해서는 당연히 더 배려를 하기 때문에, 저희가 사람보다 동물을 더 배려하자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환경이나 동물을 착취하는 건 전 지구적인 문제잖아요. 약자에 대한 폭력이 여성, 장애인, 소수자, 외국인에게 가해지다가 동물한테 넘어가는 거죠. 너무 많이 죽이고 불필요하게 많은 사육을 하고…. 우리가 그들을 착취하고 이용하면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불균형이 초래하는 재앙들이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에 동물을 포함한 환경문제는 굉장히 심각해요. 그러니까 영화를 찍지 않는 기간에는 이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어요.”

최근작인 영화 <제보자>에서 내부 고발자가 아닌 언론을 제보자로 택한 이유는 뭔가요.
“언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시기에 제의를 받았어요.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인의 자세와 언론환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175만 관객 몰이는 감독 임순례의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 내포하고 있는 드라마틱한 사건이고, 줄기세포 연구가 생명공학에 포함되고 복제나 줄기세포를 위해 희생된 동물 얘기도 안 할 수 없는 이야기니까 임순례 감독이 가장 적격자라는 생각을 했어요.
“상업영화로 만들기 힘든 소재라고 생각을 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생명공학 때문이었어요. 사람의 생명도 위험해지지만, 복제나 줄기세포를 위해 희생되는 동물의 숫자는 엄청나요. 생명공학을 너무 가볍게 연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줄기세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175만이면 제작비 BP를 넘은 건데요, 아쉬움은 남아요. 소재나 주제가 무거운 대신에 어떻게 상업적인 요소를 가미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보자>는 감독님 영화 중에 카메라가 가장 많이 움직이고 음악도 달랐어요. 숨 쉴 틈을 안 주고 관객을 끌고 가는 힘이 강했어요. ‘임순례 감독이 이렇게도 찍을 수 있구나’ 놀랐어요.
“클로즈업이 많고, 카메라 무빙도 많죠. 카메라 호흡과 편집도 빠르게 했구요. 전자음악을 써서 감정을 고조하도록 했고…. 스피디함을 줄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한 거죠.”

결혼? 남들 이혼할 나이에 무슨…

감독님 모든 영화에는 선인은 있어도 악인은 없어요.
“세상에 악마 같은 사람이 있긴 하겠지만, 다 이유가 있죠. <제보자>의 모티브가 된 사건도 우리 사회 전체가 만들어낸 허구잖아요? 한 사람, 악인의 잘못이 아니죠.”

감독님 영화들, 자식이나 다름없을 텐데요. 돌이켜보면 마음 아픈 놈, 미안한 놈, 더 마음이 가는 놈 등 다양할 것 같아요. 그리고 시나리오를 직접 쓰지 않으려고 하시는 이유는 뭔가요. <세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날아라 펭귄>이나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은 시나리오를 직접 쓰셨잖아요. 임순례다워서 정말 좋았어요.
“가장 마음이 가는 자식은(웃음) 아무래도 <와이키키 브라더스>예요. 다른 것들은 제 정서를 상업적으로 양보한 부분도 있는데, 제 정서가 제일 많이 녹아 들어가 있는 작품이죠. 시나리오를 제가 쓰면 덜 상업적인 작품이 되니까…. 예산이 적게 들어가면 제가 하고 싶은 스타일이 더 많이 들어가는 거죠. 대신 순제작비가 30억 이상 들어가면 제작자가 깊이 관여돼 있는 거잖아요. 제가 큰 손해를 끼치면 안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타협을 하는 거죠. 하지만 앞으로도 제 정서와 맞는 작품만 선택할 겁니다.”

이경영, 박해일, 문소리씨와는 친분이 각별하시죠. 특히 이경영씨와는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팬들이 많아요.(웃음)
“남들 이혼할 나이에 새삼 결혼이라니요.(웃음) 경영씨는 너무 인간적이다 보니까 부탁 거절을 못해서 다작을 하니까 가진 게 빨리 소진될까봐 걱정이 돼요. 해일씨와 소리씨는 지금까지 온 것 이상 더 나아갈 수 있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요.”

선배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청년기의 저를 외부에서 보면 거의 루저였겠죠. 살은 찌고 미래에 대한 아무 희망도 없고…. 그런데 그 시간들이 과연 무의미했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그 시간들이 내 영화에 녹아 있는 거죠. 인생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실패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 거고, 좀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많은 시도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되면 어떻고 안 되면 어때요. 두려움이 전면에 나서면 도전은 할 수가 없죠. 그러면 삶이 재미가 없잖아요.”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무서운 영화는 눈 뜨고 못 보는 치명적 결함을 가졌다는 임순례 감독. 그는 여리고 섬세한 사람, 한 번 안아달라고 조르고 싶은 사람이다. 지금도 그의 얼굴에는 엉뚱 소녀의 장난스럽고 귀여운 웃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가슴을 울렸던 대사가 떠올랐다. “넌 행복하니? 그렇게 하고 싶던 음악하고 사니까 행복하냐구.” 물어보지 않아도 그는 렌즈에 담아야 할 세상이 너무 많아서 충분히 바쁘고 행복해 보였다.

<박상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