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결말, 너만 알고 있으라고

막바지 반전은 추리소설에서는 생명과도 같은 것으로, 아직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범인이나 반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인 셈이다.

몇 달 전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아파트 난방비리 사건을 모르는 분은 드물 것이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어느 언론매체의 인터넷 기사다. 해당 기사를 쓴 기자는 외국 유명 추리소설을 구체적인 내용까지 설명하면서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가까지 가감 없이 밝히고 있었다. 기자 입장에서는 인용한 작품이 워낙 유명해서 웬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걸작으로 꼽히는 추리소설 하나가 이런 식으로 내용이 다 밝혀지는가 싶어서 놀란 기억이 있다.

소설이나 영화, TV 드라마, 기타 모든 서사는 결말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끝까지 읽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물론 과거의 실존 유명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역사소설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모르그 거리 살인사건의 현장.(화가 미상)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든 결말들
레이먼드 챈들러는 “이상적인 추리소설이란 마지막 부분이 없어졌어도 읽히는 작품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추리소설에서 독자의 예상을 뒤엎는 막판 반전은 무척 중요한 요소다. 과연 범인이 누구인가,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 수단은 무엇일까. 주인공은 어떤 식으로 범인의 자백을 받아낼 것인가 등등. 독자는 이런 것들을 상상하고 추리해가면서 작가와 머리싸움을 벌인다. 급기야 미국의 유명 추리소설가 엘러리 퀸은 데뷔작 <로마 모자 미스터리>를 비롯한 일명 ‘국명(國名) 미스터리’ 시리즈 작품마다 결말을 밝히기 전에 ‘독자에의 도전’이라는 대목을 끼워 넣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은 사건 해결에 필요한 사실들을 모두 알게 되었을 것이니 이젠 범인을 맞춰 보라’고 독자에게 도전한 것이다.

‘범죄가 발생하고 명탐정의 추리로 사건이 해결된다’는 판에 박힌 듯한 추리소설 형식인데 뭐 특별한 게 있나 싶은 분도 계시겠다. 하지만 그러한 정형적 틀 안에서 독창성과 참신함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의표를 찌르는 반전이 필요하다. 에드거 앨런 포 이래 19세기나 20세기의 고전적 작품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첨단 스릴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형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권선징악이 주류였던 초기와는 달리 시대 변혁에 맞춰 완전범죄가 이루어진다거나, 탐정이 범인을 놓친다거나 하는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결말도 종종 보인다.

‘독자에의 도전’을 제목으로 한 엘러리 퀸의 단편집.

일반적인 독자의 예상을 뒤엎는 결말이 이루어지면 뛰어난 작품, 반대로 그다지 놀랍지 않은 결말이라면 범작(凡作) 혹은 수준 미달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전체 수백 페이지짜리 장편소설을 막판의 몇 페이지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결말의 작품이 호평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막바지 반전은 추리소설에서는 생명과도 같은 것으로, 아직 작품을 읽지 않은(앞으로 읽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범인이나 반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인 셈이다. 그렇기에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결말에 대해 무심코 썼다가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

‘결말 혹은 범인 밝히기’에 관한 이야기는 다양하게 전해진다. 런던에서 장기공연중인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의 연극 <쥐덫>을 보러 온 택시 승객이 팁을 적게 주자, 운전기사가 “이 연극의 범인은 ???이에요”라 말하고 떠나버렸다거나,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게재된 추리소설을 읽은 독자가 ‘설마 끝에 모두 죽을 줄은 몰랐어요!’, ‘??가 범인이라니 놀랍네요!’ 등의 댓글을 달았다는 등의 에피소드는 관심 없는 제3자 입장에서야 우스갯소리에 불과하겠지만, 애써 작품을 쓴 작가나 막 읽으려던 사람 입장에서는 맥이 풀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셜록 홈즈의 죽음(시드니 패짓 그림)

극단적인 예로는 제목이 범인을 말해주는 경우다. 1930년대에 발간하던 잡지 <별건곤>(別乾坤)에 실린 최유범의 <약혼녀의 악마성(惡魔性)>이라는 추리소설은 제목만 봐도 엽기적 살인범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21세기 들어와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출판사의 과잉 친절이라고나 할까. 책을 미처 읽기도 전에 범인을 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유명 미국 작품의 표지에는 매우 의심스럽게 보이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으며,(외모의 특징이 너무나 뚜렷한 그 인물은 실제로 범인이었다) 어느 일본 작품은 등장인물 소개에서부터 범인과 배후 음모까지 모두 밝혀 놓아서 독자들의 원성을 자아낸 바 있다. 물론 요즘 웬만한 출판사라면 이런 실수를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민감한 편이 아니어서 남에게 어떤 결말인지 듣더라도 책을 읽는 데 그다지 지장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나 작품 해설이나 서평을 쓸 때는 조심스럽게 된다. 마치 묵비권을 행사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중요한 것은 숨긴 채 기본적인 정보만으로 앞으로 읽을 독자들의 흥미를 끌게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작품 해설부터 먼저 읽는 독자도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막힌 반전이 있다’, ‘예상 밖의 범인’ 등의 표현만으로도 일종의 누설이 되는 셈이라 신경을 써야만 한다.

범인을 알려주는 출판사의 과잉친절
약간의 예외라면 평론이나 해설이다. 서두에 ‘작품의 트릭과 범인을 언급하고 있다’고 미리 경고함으로써 비밀 누설에 대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있다. 물론 이런 비밀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딱 몇 년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또 유명하면 유명한 만큼 직·간접적으로 조금씩 전해지기 때문에 비밀의 봉인이 풀리는 셈이다.

고전적인 추리소설에는 누구나 범인을 알고 있어 이제는 굳이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작품이 있다. 최초의 추리소설이라고 일컫는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1841)은 범인의 의외성 면으로만 본다면 요즘 작품에 비교해도 모자랄 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워낙 오래된 작품이라서 그런지 작품을 읽지 않고도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결말이지만 훨씬 더 잘 알려진 것으로는 코난 도일이 창조한 명탐정 셜록 홈즈의 죽음과 귀환 이야기일 것이다. 홈즈 시리즈를 쓰는 데 싫증이 난 코난 도일이 생각해낸 이 충격적인 결말은 너무나 유명해졌다. 원작을 21세기에 맞춰 재해석한 영국 TV드라마 <셜록>에서도 홈즈가 죽은 것처럼 보이며 끝나는 장면이 있었지만, 그가 살아 돌아오리라는 것을 의심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비밀의 유효기간이 지난 것 같아도, 앞에서 언급했던 아파트 난방비리 사건 기사처럼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주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이 기사는 여러 면에서 현실과 허구의 대조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기자가 언급한 작품의 탐정은 범인을 알았으나 덮어두기로 했다. 반면 아파트 난방비리의 실제 사건에서는 의심은 가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양쪽 다 누구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또 한편으로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로 끝났다는 점에서 추리소설과 현실에 꽤 넓은 괴리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씁쓸한 사건이기도 했다.

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