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郵政)이야기]법의 여신을 비웃은 헌재

대법원, 사법연수원, 변호사회 등 법과 관련된 기관들에 가면 눈에 띄는 조각상이 있다. 디케(Dike) 상이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법의 여신으로 정의(正義), 정도(正道)를 뜻한다. 디케는 이후 로마 시대에 유스티치아(Justitia)로 바뀌는데, 정의를 뜻하는 영어 저스티스(justice)가 여기서 나왔다. 예술작품에서 디케는 칼을 든 여신으로 등장하지만, 유스티치아는 형평성의 의미를 더해 한 손엔 칼, 다른 손엔 저울을 들고 있다.

그리스어의 법(Dike)과 정의(Dikation), 로마어의 법(Jus)과 정의(Justice)에서 보듯 법과 정의는 한 몸이다. 법이 곧 정의다. 서구에서는 이 둘의 관계를 천칭(天秤)과 양날의 칼을 든 정의의 여신으로 인격화했다. 그리고 여신상을 법의 상징물로 삼아 법원 등 공공건물과 도시의 광장에 세웠다. 저울은 법의 형평성과 정의의 기준을, 칼은 엄정한 법 집행을 상징한다. 대개 눈을 가리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는데, 정의와 불의를 판정할 때 사사로움을 떠나 공평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다. 심판관의 주관성을 철저히 배제하라는 것이다. 정의의 여신상은 각 나라의 시대상황에 따라 변형된다.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앉은 자세로 눈을 뜬 채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1989년 9월에 발행된 헌법재판소 창립 1주년 기념우표. 경국대전과 법의 여신상을 형상화했다. | 우정사업본부 제공

최근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리면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법과 정의에 대해, 헌재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균형과 다양성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우표 한 장이 있다. 1989년 9월에 발행된 헌재 창립 1주년 기념우표다. 조선왕조 통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법의 여신상을 그렸다. 헌재를 상징하는 문양은 문과 기둥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창립 1주년 기념우표에 법과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 상을 담은 건 무슨 연유일까. 당시 체신부는 “헌재가 명실공히 헌법 수호 및 국민 기본권 보장 최후 보루 기관으로서 역사적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길 기원한다”고 기념우표 발행 의미를 설명했다. 공평무사한 법과 정의로운 법집행에 대한 시대적 요구, 헌재에 거는 기대와 믿음이 오롯이 우표에 담겼다.

헌재는 1987년 민주화의 산물로 ‘헌법이 정한 국민 기본권을 보장하며 국가권력의 남용을 통제하는 특별법원’이다. 국민들은 헌재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소수자를 보호하며 기본권을 신장시켜주기를 바랐다. 헌재는 지난 20여년 동안 소수자 권리 보호 등 몇몇 의미 있는 결정으로 나름 기대에 부응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헌재는 과연 민주주의의 보루인가? 경국대전과 ‘관습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논리로 위헌결정을 내렸을 때, 국민들은 헌재가 민주주의 보루가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는 보루라는 걸 눈치챘다. 그 이후에도 헌재는 여러 차례 기울어진 저울대를 들이댔고 안대를 풀어 권력의 눈치를 살피며 우표 속 유스티치아를 비웃었다.

130년 우표역사에서 법과 관련된 우표는 생각보다 적다. 헌재 우표를 포함해 근대사법 100주년 우표, 제50회 법의 날 우표 등 손에 꼽을 정도다. 몇 종 안 되지만 이들 우표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디케의 천칭을 형상화하고 있다. 디케는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면 옳은 사람이 탄 쪽은 올라가고 그른 사람이 탄 쪽이 내려가는 천칭을 이용해 시비를 가렸다. 천칭의 저울대를 형(衡)이라고 한다. 균형, 형평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다. 형량(衡量)이란 말은 심판을 내리기 전에 상반되는 주장을 충실하게 듣고 엄밀하게 무게를 재라는 뜻이다. 우표 속 작은 천칭이 형평성을 잃지 않는 법, 정의로운 판정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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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at Justitia, Ruat Caelum.’ 시저의 장인 피소가 한 말인데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뜻이란다. 법과대학 건물에 하나쯤 걸려 있는 글귀다. 정의의 여신 조각상을 세울 때 그 뒷면에 즐겨 새기는 경구라고 한다. 정의를 세우기는커녕 민주주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결정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헌재를 보면서 헌재 기념우표 속 정의의 여신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장정현 편집위원 jsal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