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황홀했던 줄포리 19년 후

줄포리는 한적하고 쓸쓸한 풍경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낡은 가게는 산뜻하게 단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가웠다. 다시 만난 소읍의 풍경이 쇠락하지 않고 의연하게 버티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어 내 마음 한 구석이 흔들렸다.

아껴서 보는 사진책들이 몇 권 있다. 카르티에 브레송에서 황규태, 마틴 파에서 노순택까지 틈이 나면 두루 훑어보는 각별한 사진집이 적지 않건만, 특히 조세희의 <침묵의 뿌리>, 민병헌의 <누드> 그리고 강운구의 <마을 삼부작>과 그 현장을 30년 후에 다시 찾아 찍은 권태균의 <강운구 마을 삼부작 30년 후>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이 울컥한다. 역사가 작은 마을에, 작은 사람들에게, 작은 풍경들에 켜켜이 쌓이고 또 지워지는 풍경을 나는 강운구와 권태균의 사진에서 본다.

내 나름 뜻한 바 있어 시간이 날 때마다 행장을 챙겨 산하를 두루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그러나 솔직히 말하여 대가인 강운구와 대가급에 근접한 권태균의 마을 풍경을 흉내조차 낼 수 없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가 여태 무르익지 못하였고, 얕은 손재주로 풍경을 바라볼 뿐이라서 렌즈 속 풍경을 응시하는 대가들의 뜨거운 눈길을 따라해 볼 시늉도 내보지 못하였다.

사실, 그럴 마음이 아예 없었는지 모른다. 나는 오로지 사물만 보았을 뿐이다. 사람을 응시할 용기가 없어 그랬는지 몰라도, 꽤 오랫동안 대도시와 군소의 읍·면·동, 그 사물들만 바라보았으니, 어쩌다 운이 좋아서 사물이 스스로 풍경이 되어 나를 맞이한 적도 있다.

2008년 6월 전북 부안군 줄포리의 모습. | 정윤수

위도의 만선에 두둥실 떠다니던 마을줄포리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 6년 전, 줄포리에 갔을 때 줄포리는 한산하였고, 하루 종일 돌아다녀 봐도 생기를 찾기 어려웠다. 건물은 남루했고 인적은 드물었으며 동네에 드리워진 가난이 한낮의 땡볕 아래 놓여 있었다. 철시된 상가, 뜯겨나간 전단지들, 지루한 걸음으로 방향 없이 지나다니는 개들, 이따금 휑하니 스쳐지나가는 승용차들. 그 차량들은 대개들 변산반도 국립공원을 지향하다가 그만 길을 잘못 들어 지체 없이 빠져나가는 듯 보였다. 그래서 몇 장 찍어 보았다. 오래된 가게 하나가 어지러운 전선줄들과 뒤엉켜 있었다.

변산반도 아래쪽, 곰소만이 있다. 곰소만 깊숙한 곳이 줄포다. 한때 서해안 어업의 중심지였다. 조기의 3대 어장 중 하나인 위도가 가까이 있어서 만선이라도 되면 줄포 또한 두둥실 떠다니는 마을이 되곤 했다. 위도를 거점으로 아래로 군산, 목포로 이어지고 위로는 대천, 서산으로 하여 인천까지 이어지는 바닷길의 요처였고 부안, 고창, 정읍, 전주로 뻗어가는 육로까지 잇닿아 있어서 줄포는 연안과 내륙의 교통 혈맥이었다.

그러나 어획량이 크게 줄고 뻘이 퇴적하여 수심이 얕아지는 바람에 1938년에 항구의 기능을 가까운 곰소항에 넘겨주면서 은성했던 줄포의 불빛은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일제가 김제·만경평야의 쌀을 수탈하면서 전략적으로 사용했던 마을이 줄포였다. 부안군 내에 유일하게 은행(조선식산은행 줄포지점)이 있었고 치안 총괄 경찰서도 줄포에 있었다.

그랬던 줄포였으나 해방 이후에도 사정은 크게 변하지 못했다. 90년대에 완전히 폐항되었는데, 지금 줄포에 가보면, 완전히 내륙의 땅이 되어 물리적인 요소를 통해 항구의 기억을 찾아보려 해도 그 흔적이 드물다. 해풍에 전해져 오는 짭짤한 내음이 한때 이곳이 은성했던 항구였음을 말해준다. 이곳의 초등학교를 다닌 서정주가 어린 시절 일본인 여자 교사와의 애틋한 추억을 시로 남겼고 송수권, 김명인 같은 시인들이 줄포리를 옛 항구의 풍경으로 기억했다.

2014년 7월의 전북 부안군 줄포리의 모습. | 정윤수

다시, 갯벌 위로 드리워지는 장엄한 노을
그랬는데, 올해 여름 다시 가보니, 줄포리는 몇 해 전의 줄포리가 아니었다. 거리가 말끔해졌고 상가들도 꽤 여럿이 살아나 있었다. 줄포리 한가운데 새로 큼직한 간판을 내걸었길래 다가가 보니 ‘국제결혼’ 상담소였다. 아마도 부안 일대 시골의 청년들과 동남아의 여인들이 저마다의 복잡한 삶 속에서 그래도 애틋한 인연 하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매듭지어주는 업체일 것이다. 그렇게 줄포리는 몇 년 전의 한적하고 쓸쓸한 풍경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몇 해 전에 보았던 낡은 가게는 어찌 되었는가. 오히려 산뜻하게 단장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페인트칠도 새로 하였고 이웃한 다른 가게들도 예전과 달리 보였다. 감히 강운구·권태균의 작업에 비길 바는 전혀 못되지만, 이렇게 수년에 걸쳐 다시 만난 소읍의 풍경이 쇠락하지 않고 의연하게 버티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어 내 마음 한 구석이 흔들렸다.

살펴보니, 지난 몇 해 동안 줄포리는 여러 가지 모색을 해왔다. 먼저 줄포 갯벌생태공원을 준비하여 이를 토대로 부안 일대 생태관광의 중심지로 삼고자 하는 의지가 돋보인다. 면적은 무려 20만여평에 달하고 갈대숲, 야생화길, 은행나무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 공원이 깃들어 있는 줄포만은 지난 2010년 1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곳이다. 만은 곧 갯벌이건대, 이로부터 생명의 갯벌이 아래로 고창과 위로 변산으로 드넓게 펼쳐진다. 지나치게 ‘관광지화’하려는 욕심만 서로들 제어한다면 갯벌과 또 갯벌 위로 드리워지는 황홀한 일몰이 이곳을 찾는 도시인들의 강팍한 마음을 한없이 어루만져줄 것이다. 줄포리 생막걸리도 전국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탔을 정도로 유명하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개인적인 감회를 말하건대, 19년 전 나는 이 줄포에서 격포항으로 이어지는 30번 국도변에서 곁에 있던 사람에게 장엄한 석양, 숭고한 노을, 드넓은 서해 끝까지 펼쳐진 황홀한 일몰을 선물한 적이 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붉은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았고 그 이후 함께 살고 있다.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