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대법관의 덕목은 보수성인가

최근 소수자 인권보다 법 논리로만 판결 잇달아 우려 목소리 높아

11월 21일, 경기도 평택시의 치유공동체 와락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가족들 20여명이 김장을 담그기 위해 모였다. 원래 이날 모임은 11월 13일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한 뒤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잡았던 자리였다.

비록 기쁨을 나누는 자리는 되지 못했지만, 해고자들과 가족들은 약속대로 모여 김장을 담갔다. 와락의 대표이자 쌍용차 해고자의 아내 권지영씨는 대법원 판결의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결로 그동안 고생했던 것을 보상받을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너무 억울하고 속상해요. 남편들이 며칠째 계속 울기만 하는 걸 보니 세상이 우릴 완전히 버리는구나, 이런 비참한 기분이 들었어요.”

10월 24일 한국법률가대회에 참석한 양승태 대법원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양 대법원장 오른쪽은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왼쪽은 황교안 법무부 장관. | 연합뉴스

대법원 판결 다음날 와락에서는 예정된 무료 치과진료 행사가 열렸다. 집안에만 있고 싶었던 권씨도 어쩔 수 없이 와락으로 출근해야 했다.

“해고자 분들이 오셔서 진료도 받고 하셨는데, 서로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많이 괴로웠어요. 쌍용차 사태가 이제 6년이 다 되어 가는데 또다시 많은 시간을 버티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요.”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그날 11월 13일을 권씨는 잊지 못한다.

14명 전원이 현직·전직 판사 출신
대법원은 쌍용차 해고가 부당했다는 취지의 2심 결과를 파기환송했다. 지난 6월 콜텍 노동자들의 정리해고가 유효하다는 판결을 내린 데 이어 또다시 노동자를 외면하고 기업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법원의 보수화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2011년 9월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이후 꾸준히 제기됐다. 당시 MB정부의 청와대는 언론에 “대법원장 자격으로 보수적 성향이 주요하게 고려됐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대법관 비율에서도 보수성이 드러난다. 양 대법원장을 비롯한 14명 전원이 현직 판사 또는 전직 판사 출신이다. 물론 비서울대, 여성, 장애인 판사도 있어 어느 정도 외형상 구색을 맞췄지만 전체적인 성향은 보수성이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이런 대법관들의 보수성을 반영하듯 양 대법원장 이후 대법원 판결은 대체로 보수적이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지난해 12월 통상임금 판결에서 대법원은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사측의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될 수 있는 경우에는 받지 못한 통상임금을 받을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다만 이인복, 이상훈, 김신 대법관은 “거듭 살펴보아도 그 논리에서 합리성을 찾을 수 없다”며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지난해 9월에는 금융권의 키코 상품 판매가 불공정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렸다. 2008년 당시 키코를 구입한 수출 중소기업들은 금융위기로 환율이 급등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대법원은 계약 당시에는 외부환경 급변을 예측하기 어려웠다며 은행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때는 대법관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대법원은 진도군 민간인 희생사건 유가족들의 국가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심을 깨고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이미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 보고서를 냈지만 대법원은 이것만으로는 증거능력이 부족하다고 본 것이다. 이인복, 이상훈, 김용덕, 김소영 대법관은 반대 의견에서 국가 측의 반증 없이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와 같은 유력한 증거물을 배제해선 안 된다고 봤지만 다수 의견에 밀렸다. 이 외에도 제주해군기지 승인처분 무효확인 소송, 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등 사회적 관심을 받은 사안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부분 국가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의 인적 구성 다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은 박보영·김신 대법관은 상대적으로 소수 의견에 서는 일이 드물었다.

쌍용차 해고무효소송 판결의 주심이었던 박 대법관(비서울대 출신 여성)의 경우, 2012년 1월 국회 임명동의 과정에서 “남성 위주의 대법원 구성에 다양성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취임 직후 전교조 시국선언 사건에서 국가질서 유지보다 표현의 자유가 우선한다는 소수 의견을 냈지만 이후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반대 의견 개진 비율도 최하위권으로 알려졌다.

권지영 와락 대표는 “비서울대 출신 여성 대법관이라고 기대를 많이 했는데 노동자에게 가혹하고 기업에 유리한 판결을 하셨다. 판결을 듣는 순간 이제 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해도 목소리를 낼 여지가 없는 것이구나, 노동자들이 기댈 곳은 없구나 온통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소아마비 장애인이자 서울이 아닌 지방법원 경력만 있는 김신 대법관 역시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그는 전수안 전 대법관 등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명한 마지막 대법관이 퇴임한 이후 임명됐다. 통상임금 판결에 있어서 반대 의견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 역시 대부분의 경우엔 다수파의 일원이었다.

다양성 평가 받는 두 명도 소수의견 적어
김 대법관 자체가 과거 친기업 판결, 종교 편향성으로 도마에 오른 바 있다. 2011년 1월 김 대법관은 재판 도중 당사자들에게 화해를 위한 기도를 하라고 요구했고, 2009년에는 대법원 판례를 무시하고 교회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김신 대법관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펼치던 당시 퇴거 결정을 내리고, 매일 100만원을 한진중공업에 지급하라는 간접강제명령을 내린 바도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 자신도 논란이 있는 판결을 여러 차례 내렸다.

대표적인 것이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태(CB) 헐값 매각 사건 판결이다. 2009년 5월 29일 대법원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자녀들이 삼성 에버랜드 CB를 헐값으로 인수한 데 대해 전·현직 임원들의 배임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양 대법원장도 취지는 조금 달랐지만 다수 의견과 같은 결론을 제출했다.

이에 앞선 2007년에는 사학비리로 퇴진한 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이 복귀하는 길을 열어준 판결을 했다. 현재 김 전 이사장은 상지대 총장으로 복귀한 상황이며, 이후 상지대는 학내분규에 휩싸여 있다.

물론 양 대법원장은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 정정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적으론 보수적 판결에 기울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수 의견에 잘 의견을 올리지 않는 고영한, 김창석, 박병대 대법관도 하급심 판사 시절 논란이 되는 판결의 주역이었다.

고영한 대법관은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시절인 2009년 3월, 삼성중공업의 충남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사고 1심에서 삼성중공업의 배상 책임을 56억원으로 판결했다. 당시 태안 주민들은 2조6000억원을 신청했었다.

2009년 고 대법관은 상하이차의 쌍용자동차 법정관리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 결정을 계기로 쌍용차는 전체 인력의 3분이 1이 넘는 2600여명의 노동자를 정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최종적으론 165명이 해고됐다.

김창석 대법관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 사건에서 이건희 회장 봐주기 판결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박병대 대법관은 서울고법 판사 시절인 2010년,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 이해승의 재산에 대한 국가 귀속을 취소시키라는 판결을 내렸다. 작위를 받은 사유가 한일합병에 대한 공로인지 증거가 부족하다고 본 것이었다.

보수 일색 대법원 구성 바꿔야
신영철 대법관은 2008~9년 촛불집회 관련 사건 재판과정에서 후배 법관들에게 전화로 재판 개입을 했다는 논란의 주인공이다. 2009년 5월 대법원 윤리위원회에서 재판 개입이 사실로 드러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양승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소수자 보호 취지의 목소리를 가장 많이낸 것은 서울대 법대 출신의 이상훈, 이인복 대법관이었다.

전문가들은 대법원 판결의 사회적 영향이 큰 만큼 보수 일색의 대법원 구성이 바뀔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는 “대법원 사건은 한국 사회 전반에 가치 기준을 세워주는 사건이다. 한쪽으로 쏠린 대법원이 민법에 적힌 논리만 갖고 따지는 판결이 계속되면 소수자와 인권의 가치가 보호받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재화 변호사(민변 사법위원장)는 “대법관 후보에 대해 신체적으로 소수자, 약자냐가 아니라 실제로 소수자, 약자를 위한 삶을 걸어온 법률가인지 시민사회가 더욱 세심하게 검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 권지영 씨는 “대법원에서 이렇게 해고노동자들을 내팽개치면 우리사회 전체가 노동자의 권리를 우숩게 생각할까 걱정된다.

대법관 선출방식 개선방안은

대법관은 어떻게 선출되나? 헌법 104조에 따르면,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연임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은 있지만 1987년 이후 이회창 전 대법관 등 극히 일부만 연임한 바 있다.

대법원장은 어떤 절차를 거쳐 대법관을 인사 제청할까. 법원조직법 제41조의 2에 따르면 대법원장은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하게 되어 있다. 후보추천위에는 총 10명이 들어간다. 문제는 10명의 위원 중 사실상 과반수가 대법원장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일단 10명의 추천위원 중 3명이 현직 법관(선임대법관, 법원행정처장, 대법관이 아닌 법관)이다. 또한 대법원장은 별도로 변호사 자격이 없는 3명의 추천위원을 위촉할 수 있다.

추천위원회 과정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후보추천위의 권한과 기능을 명시한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규칙은 여러 가지 비공개 조항을 갖고 있다. 회의 내용도, 추천된 후보자의 인적사항도 비공개다. 만약 대법관 후보가 공개적으로 추천됐을 경우에는 심사대상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조항도 있다.

한상희 건국대 법률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미 2012년 8월 발표한 ‘대법관 임명절차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서 위와 같은 문제점들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상고법원 설치 등을 개혁방안으로 내놓았을 뿐 대법관 선출방식에 대해서는 별다른 입장이 없다. 한 교수는 “현재의 대법관 제청절차는 철저한 비밀주의”라며 “비밀의 장막 속에서 대법원장 또는 배후의 정치권력이 전횡할 수 있는 무한한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성을 상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법관 선출방식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다. 현행 법원조직법 42조는 대법관의 자격을 만 45세 이상이며, 20년 이상을 판사·검사·변호사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대법관 자리는 ‘서울대 법대를 나온 판사 출신 남성’이 독점해 왔다. 국회 입법조사처 자료에 따르면 1980년 이후 대법관 85명 중 95%가 남성, 75%가 서울대 법대 출신, 89%가 판사 출신이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대법관의 다양화 목소리가 일었다. 2003년에는 최종영 당시 대법원장이 관례대로 법원 내 서열 순으로 대법관을 제청하려 하자 144명의 판사들이 이에 항의하는 연판장에 서명하기도 했다.

최근 장윤석 새누리당 의원 및 여야 의원 146명은 대법관의 절반을 비법관 출신이 맡게 하는 법률개정안을 제출했다. 법률개정안 제안이유서는 “1980년대 이후 임명된 대법관이 판사 출신에 편중돼 있었다”며 “대법원 구성의 사회적 다양성을 보장해 사법부의 신뢰 회복을 도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변호사 자격이 없더라도 대법관이 될 수 있도록 법원조직법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본만 해도 최고재판소에 변호사 자격이 없는 법학자나 행정관료 등이 들어가 있다”며 “대법원이 정책법원으로서의 지향이 명확하다면 법 논리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견지에서 판단을 내리는 대법관 구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한변협은 대법관 구성 다양화에는 찬성하지만 변호사 자격증이 없는 대법관 지명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노영희 대한변협 대변인은 “3심은 법률심인데 변호사 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법관이 됐을 경우 재판 당사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아직은 비변호사 출신 대법관 논의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대법관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는 입장도 나온다. 법원조직법은 대법원장을 포함해 대법관의 수를 14명으로 못박고 있다. 대한변협 등 법률가 단체들도 대법관의 과중한 업무부담 등을 들어 대법관 증원을 수차례 요구해 왔다.

임지봉 교수는 “대법관 증원은 법 개정만으로 가능한 사안이다. 현행 헌법이 유지된다는 전제 하에, 대법관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다양화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