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폰도 망명해야 하나

경찰ㆍ이통사, 스마트폰 GPSㆍ와이파이 기능 강제 작동시킬 수 있는 시스템 이미 구축…

가입자 위치 손금보듯 악용 우려

누군가 당신의 스마트폰 GPS나 와이파이(Wi-Fi) 기능을 원격으로 작동시켜 당신의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면? 가상의 상황이 아니다. 현재 경찰이 운영 중인 112 신고시스템에는 신고자의 스마트폰을 원격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기능이 마련돼 있다. 관련 법안이 아직 국회를 거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국가기관이 법적 근거도 마련하지 않은 채 국민의 민감한 개인 위치정보를 수집할 시스템을 구축한 셈이다.

올해 1월 경찰은 112로 신고한 신고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신고자의 스마트폰 위성항법장치(GPS)와 와이파이 기능을 강제로 작동시킬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밝혔다. 계기는 2012년 4월 경기도 수원에서 벌어진 ‘오원춘 성폭행·살해사건’이었다. 당시 사건의 피해자가 112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신고를 접수한 경찰관이 범행장소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지 못한 채 통화가 끊어진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경찰이 범죄현장을 파악조차 못하는 동안 피해자가 살해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고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도입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경찰이 이동통신사 등 위치정보사업자로부터 개인 위치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게 하는 ‘위치정보의 보호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위치정보법) 개정안도 그해 11월부터 시행됐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 한선교 위원장(가운데)이 지난 5월 법안 상정에 반대해 야당 위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여당 단독으로 전체회의를 열어 위치정보법 개정안을 포함한 법안들을 심사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문제는 경찰이 법으로 허용된 정도를 넘어 개인 위치정보에 손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데서 시작됐다. 현재 이동통신시장에 보급된 대부분의 스마트폰 단말기에는 GPS와 와이파이 기능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배터리를 아끼려는 등의 이유로 스마트폰 이용자가 해당 기능을 꺼버릴 경우 긴급구조 시에 해당 기능을 통한 정확한 위치정보를 얻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경찰과 방송통신위원회, 이통사 및 제조사 등은 협의를 거쳐 2012년 10월 이후 출시된 국내산 스마트폰 단말기는 이통사가 원격으로 해당 기능을 강제로 켤 수 있게 만들었다. 국산 단말기를 구매한 이용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경찰과 이통사가 원격으로 접근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사서 쓰게 된 셈이다.

긴급구조 명분 개인 위치정보 무차별 노출
뒤늦게 여당 의원들이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 나섰다. 새누리당 한선교 의원 등 의원 18명은 긴급구조 요청 시 스마트폰의 GPS와 와이파이 기능을 강제로 작동시켜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 담긴 위치정보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개정안에는 GPS 및 와이파이 강제 작동 외에도 구조대상자의 가족이 긴급구조를 요청할 경우 긴급구조기관이 구조대상자의 개인 위치정보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 구조요청자와 구조대상자의 가족관계를 전산망을 통해 쉽게 확인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또 위치정보가 파악되는 당사자의 동의가 있거나 긴급구조 상황일 경우 위치정보를 제3자에게 알릴 수 있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개정안은 아직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에 계류 중이지만 민감한 개인 위치정보에 관한 법안이라 자칫 개인 위치정보가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우려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높다. 해당 개정안을 검토한 입법조사관도 검토보고서에서 “긴급구조기관에 의한 개인 위치정보의 오·남용 가능성을 높일 수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 마련도 필수적으로 병행되어야 할 것”이라는 검토의견을 냈다.

개정안에서 드러난 취약점이 현실화되면 최악의 경우 가정폭력 피해자를 구조하는 대신 오히려 궁지에 몰아넣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배우자 혹은 2촌 이내 가족의 요청이 있으면 구조대상자라는 이유로 강제로 위치정보를 파악한 뒤 배우자·가족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가족이 구조대상자의 구조를 요청하면서 구조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정폭력을 피해 도피한 피해자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 악용했더라도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것이다.

긴급구조를 위해서라는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정부기관의 광범위한 위치정보 수집에 대해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유는 또 있다. 정부가 단말기를 통한 위치정보 수집에 그치지 않고 이동통신 3사가 설치한 전국의 와이파이망을 통해서도 위치정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정호준 의원이 방통위와 인터넷진흥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인터넷진흥원은 이동통신 3사의 와이파이망과 공공 와이파이망의 위치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작업을 완료한 것으로 드러났다.

외국산ㆍ구형 단말기로 갈아탈까 고민
와이파이 위치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분석한 결과 위치정보 수집 대상지역이 치안 취약지역 대신 지하철 역사 등 일부 영역에만 편중돼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긴급구조 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터넷진흥원의 해명과는 달리 정작 주택가나 도로변과 같은 구조요청 다발지역에는 데이터베이스 구축 상태가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위치정보를 강제적으로 수집하는 시스템이 갖춰졌다는 소식에 시민들은 또 다른 ‘사이버 망명’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제 활성화 기능이 들어간 단말기는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제조업체의 단말기에만 국한되기 때문이다. 2012년 10월 이전에 출시된 구형 스마트폰이나 피처폰을 제외하면 선택지는 애플이나 소니 등 해외 제조업체에서 나온 스마트폰밖에 없다.

강제적인 원격 GPS·와이파이 활성화가 가능한 단말기가 시장에 나온 지 2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데 대한 충격도 컸다. “아이폰처럼 해외에서 만든 스마트폰을 써야 그나마 안심할 수 있다는 게 씁쓸합니다.” 스마트폰 제조사에 다니는 직장인 한모씨(36)는 “우리 회사에서 만들고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제품에 경찰이나 통신회사가 원격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걸 나도 몰랐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라며 “외부에서 내 스마트폰에 접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만 했어도 이만큼의 불신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움직임이 카카오톡에서 텔레그램으로의 사이버 망명을 부추긴 데 이어 또다시 불안에 빠진 시민들이 국내 업체의 제품과 서비스를 등지게 하는 반응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는 “스마트폰이 확산되면서 휴대전화는 그야말로 내밀한 매체가 되었는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까지 모두 들여다볼 수 있다고 걱정하게 되니 시민들이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일련의 사태는 정보·수사기관이 카카오 사태에 이어 사이버 검열을 강화하려는 프레임을 짜고 있다는 의심이 들게 할 정도다”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