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郵政)이야기]5000만이 쓰는 가을편지

따가운 햇살이 가을의 이마를 핥고 지나간다. 하늘은 너무 깊어서 어지럽다. 어느새 조석으로 부는 바람 서늘해서 이불을 끌어당긴다. 문득, 누군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고 싶은 계절, 이맘때면 ‘가을 편지’가 생각난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정작 가사를 지은 시인은 “늘 벗들에게 놀림 받는 노랫말”이라는데 사람들은 어김없이 ‘가을 편지’를 흥얼거린다. 언제부턴가 편지는 멸실되고 노래만 남는 시대가 되었다. 기다림이라든가 설렘 따위는 모두 도둑맞고, 손글씨에 배어 있는 애틋함에 심장이 저릿하던 기억 아득하다.

20일 서울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우정사업본부 ‘2014 Soul Korea 5000만 편지쓰기 국민소통문화 대축제’ 개막식에서 김준호 본부장(가운데) 등 참석자들이 편지쓰기 문화 확산을 기원하는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편지! 소통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대축제는 학교, 기업, 청소년단체, 군부대, 다문화 가족, 외국인 관광객 등이 참여해 전국에서 다음 달 8일까지 계속된다. | 우정사업본부 제공

디지털 세상, 말들은 가벼워지고 단도직입적인 문자들은 무한속도로 날아든다. 그럴수록 사람 냄새 나는 손글이 그립다. ‘스네일 메일’이란 말이 있다. 이메일보다 배달이 늦는 일반 우편을 누리꾼들이 달팽이(snail)처럼 느려터졌다며 비하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몇 해 전 미국에서 이 스네일 메일이 주목받은 적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디자이너가 이메일을 손글씨로 바꿔 전해주는 ‘스네일 메일 마이 이메일’ 운동을 한 달 동안 벌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보였다. 이런 현상은 고리타분한 사람들의 향수 찾기나 디지털 문화에 대한 막연한 반발이 아니다. 차갑고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만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균형을 잡고 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메일이나 문자에는 없는 편지의 정서적 가치엔 유효기간이 없다.

우본이 다음 달 8일까지 펼치는 ‘5000만 편지쓰기’ 홍보 포스터. | 우정사업본부 제공

편지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 갖고 싶거나,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 갖고 싶을 때’, 그럴 때마다 쓰는 자기고백의 글이 편지다. 희망과 절망, 행복과 불행, 분노와 용서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과 이별에 대해서 가장 간절한 이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글이 편지다. 그렇게 편지를 쓰다보면 생각이 여물고 더 넓은 세상과 만나게 된다.

편지는 하찮은 일상에 활력을 끼얹는 마력도 가졌다. 특히 가을 편지는 어떤 보약보다 영험하다. 남자들은 가을이 되면 로맨스를 꿈꾼다. 남성을 더욱 남성스럽게 해주는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다른 계절보다 가을에 많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이 호르몬은 30대부터 매년 1%씩 줄어드는데 너무 급격하게 줄 경우 남성 갱년기를 앓는다고 한다. 중년 이후 남성들이 유독 가을을 타는 이유를 알겠다. 이때 필요한 건 보약이 아니다. 그보다 아내의 체취가 묻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는 손편지 한 장이 최고의 묘약이 될 수 있다. 이건 필자의 말이 아니라 전문의의 처방이다.

우정사업본부가 때맞춰 ‘5000만 편지쓰기’ 행사를 벌인다. 이달 20일부터 내달 8일까지 3주 동안 여는데 개인·단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편지나 엽서에 ‘하트’ 표시를 하고 우표를 붙여 발송하면 되고, 단체는 우체국에 사전에 참가신청을 해야 된다. 우수 참여기관 및 단체에는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상 등이 수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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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에 사랑하고 그리운 이에게 ‘단풍 빛 편지’ 한 통씩 띄우면 좋겠다. 진정한 편지에는 미사여구가 필요 없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쓰면 될 일. 고 최인호 작가의 1주기 추모전 유품 중엔 이런 편지도 있다. ‘황정숙씨. 놀라셨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이번 10월 4일 날 자랑스레 공군에 입대하는 애국적 거사에 앞서 그동안에 제가 공연히 불안스런 봄닭처럼 괴롭힌 죄과에 대해 사과도 할 겸, 인사도 드릴 겸 한 번 뵈었으면 하는 바입니다…. 이쁜씨. 어쩌면 댁은 그동안에 결혼을 하셔서 남의 사모님으로 착한 부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옵고, 아니면 어느 착한 학생들이 있는 중학교 선생님으로 인기를 끌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찬 땅바닥을 기고 있는 판에 말입니다. 핫하….’ 최인호가 대학생 시절 길에서 만난 여대생에게 반해 장장 넉 장에 걸쳐 쓴 구애편지다. 익살과 너스레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훗날 정숙씨는 최인호의 아내가 되었다. 편지란 이런 것이다.

<장정현 편집위원 jsal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