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공부 못하면 자습실도 이용 못하는 학교

당신에게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시립도서관을 이용하러 갔다고 상상해 봅시다. 아들은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도서관에 갔지만 들어갈 수 없습니다. 빈 자리가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서관측은 입장이 안 된다고 잘라 말합니다. 키가 180㎝ 이하인 학생은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다는 도서관측의 규정 때문이랍니다. 아들 키는 175㎝. “키가 작다고 도서관에 들여보내지 않아? 이런 말도 안 되는 규정이 어딨어?” 당신은 버럭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 도서관에 따지러 갈 게 틀림없습니다. 키가 180㎝ 이하인 학생은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다는 규정은 누가 봐도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럼 이 기준은 어떨까요.

‘학교 성적이 150등 이내에 드는 학생만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 당신은 또 화를 버럭 낼 게 틀림없습니다. 아들 성적은 전교 200등. 당신은 꼭 아들이 이용을 못해서가 아니라 성적순으로 도서관 이용 자격을 준다는 규정 자체가 부당하다고 느낍니다. 도서관은 남녀노소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하는 시설이라는 게 당신의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이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황당할까’라고 가슴을 쓸어내린다면, 당신은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입니다.

제가 사는 목동에 강서고등학교라고 있습니다. 일반고 치고는 나름 명문으로 불립니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이른바 ‘스카이’에 매년 수십명씩 진학시킨다고 합니다. 이 학교의 교훈을 찾아보니 ‘참되게, 착하게, 씩씩하게, 부지런하게’이더군요. 그런데 강서고에선 교훈대로 살아도 공부를 못하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 학교의 행복은 오로지 ‘성적순’이기 때문입니다.

강서고에서 운영하는 자습실도 ‘성적순’입니다. 학년별로 180개의 좌석이 있는데 1~150등까지는 성적순으로 앉습니다. 나머지 30석은 추첨으로 정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도 석차가 150등 안에 들지 않으면 자습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심지어 좌석도 ‘성적순’입니다. 1등 좌석이 크고 널찍한 타워팰리스라면 석차가 낮아질수록 자리 간격이 좁아져 150등 부근은 좌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공부 잘하는 애, 못하는 애로 구분됩니다. 서열화됩니다. 양극화됩니다. 공부 잘하는 애가 좋은 자리까지 차지합니다. 학교가 승자독식 문화를 조장합니다. 자습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식당이나 교실에서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 심정이 어떨까요. 공부 좀 못했다고 배척당하고, 소외되고, 차별받고, 투명인간 취급받는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위축될지, 아예 미래를 포기하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교육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보통의 도서관처럼 오는 순서대로 앉으면 간단한 것을 굳이 이렇게 구분하고 서열화한 그 마음이, 그 노림수가 바로 비교육적입니다.

강서고는 시험기간도 절묘합니다. 올해의 경우 추석 연휴 다음날부터 중간고사를 치렀습니다. 연휴 때 놀지 말고 공부하라는 강력한 신호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추석 때 고향에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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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더 화가 나는 건 이런 불합리한 관행이 몇 년째 개선되지 않고 버젓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인권이 노골적으로 무시되고, 학생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낳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교사들도,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교육청도, 인권위원회도 다들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고 있습니다. 스카이에 수십 명 보내는 명문고라는 아우라에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교사들도 눈 멀고 길들여져 방관 내지 외면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교육이 언제부터 잘하는 학생들만 집중 관리해 좋은 대학 보내는 걸로 변질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강서고뿐이겠습니까. 강서고는 그저 한국 교육의 축소판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건강한 사회는 잘못된 관행을 빨리 바로잡습니다. 자신들이 똥을 싸고 있는지, 오줌을 지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강서고를 지켜보노라면 우리 사회가 깊은 병에 걸려 있는 것 같아 괜히 안절부절못하게 됩니다.

<류형열 편집장 rh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