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장기투쟁 노조들 가장 힘든 적은 ‘내부갈등’

기약 없는 싸움에 사소한 일로 등 돌리거나 사용자 이간질에 분열 ‘지우기 힘든 상처’ 남겨

2472일. 9월 26일 현재 재능교육의 학습지노조 조합원들이 이어가고 있는 농성일수다. 2007년 12월부터 시작된 회사와의 싸움은 일곱 번 해를 넘기면서도 끝나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 천막은 사측이 철거하면 조합원들이 다시 세우는 일이 반복됐다. 천막을 치는 것은 어쩌면 가장 쉬운 일에 속할지도 모른다. 긴 싸움을 이어가는 조합원들이 직면해야 하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특히 ‘장기투쟁’에 들어간 노조이면 흔하게 마주하게 되는 내부 갈등은 조합원들 사이에 가장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기곤 한다.

9월 16일 ‘재능교육 투쟁 승리를 위한 지원대책위원회’(지대위)는 8월 말부터 두 차례 벌어진 사측의 농성천막 강제철거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식적인 노조인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재능교육지부(재능노조)가 아니라 지대위 명의로 회견이 진행된 것은 재능노조 조합원 외에 연대단체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대위에 참여하는 조합원 3인이 재능노조 지도부와는 다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202일 동안의 혜화동성당 종탑 고공농성을 마치며 재능노조가 사측과 해고자 복직 및 단체협약 원상복구 등에 합의했을 때도 3인의 조합원들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고공농성 전부터 불거진 내부 갈등이 다른 길을 걷게 만든 탓이었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인천 부평구의 한 연습실에서 무대에 올릴 연극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편들 수 없는 상급단체도 곤혹
고공농성에 들어갈 무렵 이미 11명밖에 남지 않았던 노조는 작은 갈등이 쌓이면서 서울시청 부근 환구단 자리에 농성천막을 친 ‘환구단파’와 혜화동성당 종탑에 오른 ‘종탑파’로 나뉘었다. 문제의 뿌리를 찾자면 역시 1800일이 넘는 장기농성 때문이었다. “그렇게 긴 기간을 버티고, (인원도) 겨우 그만큼밖에 안 남았는데 왜 갈라졌는지 궁금하다고도 하던데요. 반대로 그렇게 오래 싸우면서, 적은 인원만 남았으니까 그런 결과가 생긴 거죠.” 양쪽의 사정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한 노동단체 활동가가 지목한 ‘노노갈등’의 이유도 장기투쟁이었다. 노사갈등이 길어질수록 생계를 이유로 이탈하는 조합원은 늘 수밖에 없다. 결국 소수의 조합원만이 남은 노조에선 조합원 개인의 성격과 같은 사소한 갈등요인이 더 부각되면서 장기투쟁에 시달린 조합원들을 갈라놓게 된다는 설명이다.

사측과의 투쟁과정에서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알려져서 좋을 일이 없기에 조합원들은 대외적으로 입을 다문다. 연대와 지지라는 이름으로 농성을 지원하는 상급 노동단체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도 내부 갈등에 대해선 입장을 보이기가 조심스러워진다. 장기투쟁으로 인한 노조 내부의 갈등이 당사자인 노조원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연대단체 입장에서는 차라리 어느 한편이 사측 편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낫다. 이 경우가 투쟁방식의 차이로 갈라설 때보다는 어느 쪽을 손들어주고 연대할지가 뻔하기 때문이다. “노조 내부에서는 온갖 욕설과 험담까지 난무하지만 외부에는 곧이곧대로 밝힐 수 없는 조합원들처럼, 주변의 활동가들도 개인 심정적으로는 어느 편을 지지해도 속내를 보이긴 쉽지 않아요.” 노노갈등은 활동가들이 익명을 전제로 말할 정도로 민감한 부분이다.

장기투쟁 과정에서 노노갈등이 벌어지는 것은 재능교육 노조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한진중공업지회, 쌍용차지부 등 비교적 조합원 수가 많았던 대형사업장에서도 내부 갈등과 일부 조합원들의 태도 변화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부 갈등을 겪은 장기투쟁 노조들 대부분이 분열과 갈등으로 와해되는 것은 아니다. 9월 16일 재능 지대위 기자회견장에 함께 참석한 연대단체들 역시 장기투쟁 과정에서 내부 갈등을 겪은 바 있는 이들 노조였다.

특히 기타제조업체인 콜트·콜텍에서 일했던 조합원들은 장기투쟁의 생리를 잘 아는 만큼 투쟁사업장 등지에서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올해 6월 해고 무효소송이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하며 충격을 입었지만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인천 부평구 옛 콜트공장 주변에서 매주 문화제를 여는 것은 물론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연극 장르에까지 도전한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를 무대로 옮긴 연극에서 해고노동자들은 지역 재개발 때문에 영업장을 잃은 임차상인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법으로 들어가게 해줘요.”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말이 많아.”

콜텍지회에서 조직부장을 맡았던 김경봉씨는 연극에서 콜트·콜텍 해고자들에게 내려진 대법원 판결처럼 ‘법 앞에서’ ‘법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막는 문지기 역할을 맡았다. 대법원 판결까지 김씨를 비롯한 조합원들의 기다림도 2600일을 넘겨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남은 조합원들은 아직 기다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9월 18일부터 21일까지 4회의 공연을 마친 후 23일 재공연까지 치른 무대에서 조합원들은 “법이 가리고 배제했던 것들, 하지만 끈질기게 법을 응시하고 법 앞에서 얼쩡거린 사람들이 꾸준히 쌓아온 가치들”을 지키는 일이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연대활동으로 갈등 푸는 노조도
콜트·콜텍 조합원들을 비롯해 장기투쟁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노조의 조합원들이 주목하고 있는 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고공농성장이다. 9월 26일 현재 123일째 경북 칠곡군에 있는 스타케미칼 공장 굴뚝에 해고자인 차광호 전 지회장이 올라가 있다. 2011년 3월 가동에 들어간 화섬업체 스타케미칼 공장이 갑작스런 폐업에 들어간 것은 채 2년도 되지 않은 2013년 1월부터였다. 모기업 스타플렉스의 기업청산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처럼 노조 내부의 노노갈등도 수순처럼 잇따랐다. 폐업 위로금을 받고 권고사직에 합의한 조합원들 외에 공장 가동을 요구한 조합원 28명이 전원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이다.

“스타케미칼은 구조조정을 관철하기 위해 친사용자 성향의 노조 집행부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폐업방침에 공포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정서를 이용해 노동자 사이를 분열시켜 손쉽게 구조조정 목적을 이뤘다.” 해고자 박성호씨는 1996년 한국합섬 시절의 대규모 투쟁 때부터 지역 노동현장을 선도해온 노조가 순식간에 와해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현재 고공농성 중인 차광호 전 지회장이 물러난 자리에 들어선 새 노조 지도부는 “희망퇴직이 실리적”이라는 이유로 회사의 요구에 그대로 응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노조라는 명칭도 쓸 수 없는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는 차 전 지회장이 언제 내려올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202일을 기록한 재능노조의 고공농성, 309일간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랐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고공농성보다 기간이 짧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한여름 뙤약볕을 버틴 차 전 지회장에게 식사 외에 비와 햇볕을 피할 생필품 반입이 허용된 것은 여름도 지나가는 8월 말이 다 돼서였다. “(사측과 합의한) 노조가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다. 어용의 진실을 밝히고 싶다.” 고공농성에 들어간 직후 차 전 지회장이 조합원들에게 전한 말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5년 만에 재가동했던 공장이다. 일자리를 다시 잃고 싶지는 않다”는 게 그가 굴뚝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이유의 전부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