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郵政)이야기]우체국 대포통장 꼼짝마라!

어느 날 이 모 할머니(70)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는 검찰청입니다. 최근에 농협 직원이 고객 돈을 몰래 빼돌리는 일이 발생해 검찰에서 고객 돈을 안전하게 보관했다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정기예금을 해약한 후 타 은행 계좌와 우체국 계좌로 나눠 이체하고 누구한테도 절대 말하지 마세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할머니는 손이 떨리고 눈앞이 캄캄했다. 마음이 급해진 할머니는 전화기 속 목소리가 시킨 대로 농협 예금액 1950만원 중 1450만원을 타 은행계좌로 서둘러 송금을 끝냈다. 그리고 수표로 인출한 나머지 500만원을 송금하기 위해 우체국을 찾았다. 할머니의 눈빛은 흔들리고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금계좌 명의와 받는 사람 이름이 다른 점을 발견한 우체국 직원은 대포통장을 악용한 보이스피싱 사기임을 직감했다. 우체국 직원은 지급정지를 요청하고 할머니한테 금융사기임을 알렸다. 이 돈은 할머니가 평생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모은 돈이었다. 600만원은 타 은행 CD기에서 이미 인출되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나머지 돈은 지킬 수 있었다.

대포통장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금감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만 피해 건수가 2만1464건에 달한다. 2012년의 2만16건에 비해 7.2%나 증가한 수치다. 올 상반기에도 1만1082건이 접수돼 피해 건수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피해 액수도 눈덩이처럼 불어나 2012년 1165억원, 지난해 1382억에 달했고, 올해는 1700억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김준호 우정사업본부장(뒷줄 가운데)과 광화문우체국 직원들이 지난 18일 대포통장과의 전쟁을 선포한 뒤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우정사업본부 제공

대포통장은 제3자 명의를 도용해 통장 실사용자와 명의자가 다른 통장이다. 금융거래 경로를 알 수가 없어 탈세나 금융사기 등의 범죄에 악용되고 있다. 특히 보이스피싱 사기단에게 대포통장은 필수 무기다. 중국에 거처를 둔 조직범죄단이 한국인에게 전화를 거는 수법으로 사기행각을 벌이기 시작한 시점은 2006년부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초기에는 세금환급 등을 미끼로 내세운 단순한 전화 사기였다. 그때만 해도 어눌한 목소리로 무차별적으로 전화를 거는 탓에 들통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신·변종 사기수법이 등장하고 어투까지 세련되어지면서 눈 뜨고 코 베이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포통장을 개설할 때 은행과 농협 등을 주로 ‘애용’하던 사기범들이 최근에는 다양한 금융기관을 이용하고 있다. 은행과 농협이 통장개설 절차를 까다롭게 바꾸자 풍선효과가 나타나 우체국, 증권사 계좌 등을 악용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금융기관별 대포통장 발급 건수 중에서 우체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 1.5%에 불과하던 것이 하반기에 14.9%로 껑충 뛰더니 올 상반기에 21.7%까지 올랐다.

급기야 우정사업본부(본부장 김준호)가 ‘전쟁’을 선포했다. 각종 금융사기에 악용되는 대포통장의 뿌리를 뽑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우선 통장발급 절차를 대폭 강화했다. 제3자와 동행해 통장발급을 요청하거나 단기간에 여러 개의 계좌를 만드는 등 의심거래자(10개 유형 90개 항목)는 통장개설을 제한하고, 신규 및 휴면고객의 현금·체크카드는 신청일로부터 15일 이후에 발급하기로 했다. 통장이 개설된 경우에도 의심계좌의 모니터링을 강화해 미심쩍은 거래 땐 즉각 지급을 정지한다.

대포통장과의 일전에 나선 우본의 의지가 워낙 강하고 대책들이 촘촘해서 상당한 성과가 기대된다. ‘대포통장 발급 최다 기관’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농협도 올 3월부터 7월 초까지 대포통장과의 100일 전쟁을 벌여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바 있다. 농협은 이 기간 동안 전체 금융기관에서 차지하는 대포통장 발생 비율을 무려 55.8%포인트나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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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은 강력하게, 시행은 섬세하게! 서민 눈물을 훔치는 대포통장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려면 고객은 통장 발급에 다소 불편이 있더라도 참아주는 미덕이 필요하고, 금융기관은 아무리 좋은 대책도 선의의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장정현 편집위원 jsal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