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郵政)이야기]표정이 있는 우편함

이사준비를 끝낸 은주가 작은 카드에 편지를 쓴다. “기다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혹 받으시면 꼭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1999년 12월 21일.” 이사를 온 성현이 우편함에서 편지를 발견하고 답장을 쓴다. “편지는 오지 않았습니다. 오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1997년 12월 28일.” 2년간의 시간차를 두고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보여주는 판타지 멜로영화 ‘시월애’의 한 장면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사랑이야기를 말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 있다. 바로 요술상자 같은 우편함이다. 주인공 은주(전지현 분)와 성현(이정재 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주 천천히 사랑을 느껴간다. 시작부터 끝까지 화면은 그림 같다. 그 그림 같은 풍경을 완성시키는 것은 ‘일마레’(바다)라는 이름을 가진 바닷가의 집도,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도,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도 아니다. 집 앞에 서 있는 작은 우편함이 있어 풍경은 완성된다. 우편함은 은주와 성현의 사랑을 이어주는 타임머신이기도 하고 큐피드의 화살이기도 하다.

<사랑 그리고 상상>. 우정사업본부가 엊그제 발표한 ‘예쁜 우편함 사진 공모전’ 대상 작품(김현숙씨 작)이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4가 대명길 21-5 골목길에 있다. 로봇그림과 화분이 잘 어울린다. 가슴에 하트를 달고 있는 로봇이 금세라도 사랑을 전해주고 상상의 세계로 안내해 줄 것만 같다. 이번 공모전에는 전국에서 1628개 작품이 접수됐다. 그 가운데서 20개 작품이 예쁜 우체통에 뽑혔다. 수상작들은 하나같이 정겹고 익살스럽고 앙증맞다. 금상을 받은 ‘청바지 우편함’은 청바지 뒷주머니에 편지를 꽂도록 한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은상 ‘기다림의 미학’은 언뜻 보면 굴뚝 같고 새집 같다. 우편함 위에 솟대를 얹었는데 새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또 다른 은상 작품인 ‘우편아비’는 성인 키 높이의 등나무 속을 파내 몸통을 만들고 머리·팔·다리·손발을 조립해 만든 우편함이다. 빨간 대문 앞에 서서 오는 사람 어서 오시라고, 가는 사람 잘 가라며 손을 흔드는 목각인형이 정겹다. 이밖에 생수통, 항아리, 고사목 등을 활용해 만든 우편함이 있는가 하면 다가구 주택에 사는 세 가구가 한 지붕 아래 나란히 만든 ‘세가족 우편함’도 있다. 모두 아이디어가 기발하다.(입상작들은 다음달 20일 열리는 ‘SEOUL KOREA ５０００만 편지쓰기’ 개막식 행사에 전시된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예쁜 우편함 대상 ‘사랑 그리고 상상’, 금상 ‘청바지 우편함’, 은상 ‘기다림의 미학’과 ‘우편아비’. | 우정사업본부 제공

골목에 알록달록한 옷을 차려 입은 우편함 하나만 있어도 칙칙한 골목이 환해지고 마을 풍경이 바뀐다. 마당이나 대문에 예쁜 우편함을 걸어둔 집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진다. 그리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틀림없이 낭만이 있는 노부부나 멋을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리라.

아파트와 고층건물의 규격우편함에도 개성을 입힐 순 없을까. 철제 우편함들은 반듯반듯하긴 하지만 잿빛 도시를 닮아 차갑고 무표정하다. 싸늘하고 천편일률적인 우편함에 온기가 있는 우편물이 담길 리 없다. ‘성동구 금호 4가 282번지/네 가구가 사는 우편함//…/비씨카드주식회사/전화요금납부통지서/자동차세영수증/통합공과금/…/통합공과금독촉장/대우전자할부납입통지서/94토지등급정기조정결과통지서//이 시대에는 왜 사연은 없고/ 납부통지서만 날아오는가//….’ (함민복 ‘자본주의의 사연’ 중에서) 사연을 잃어버린 시대, 한 줌의 감성이라도 간직하고 살아가야겠다. 새로 짓는 아파트나 다중시설부터라도 우편함에 표정을 입혔으면 좋겠다. 설사 우편함 안에 고지서나 홍보전단만 쌓인다고 해도 우편함이 멋지면 들고 나는 사람들의 마음이 덜 삭막해지지 않을까 해서 해보는 말이다.

<장정현 편집위원 jsal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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