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고생하면 늙어서도 고생

소득에 따른 활동·비활동적 기대여명, 황혼기 ‘18년의 격차’ 벌어져

‘젊어서 고생’은 더 이상 ‘사서 할’ 것이 아니다. 가난으로 고생했던 젊은 시절이 그대로 노후의 ‘골병’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미 세간의 상식이 됐다. 빅데이터와 통계도 이러한 상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소득이 적을수록 기대여명이 짧을 것이라는 인식처럼 소득이 적을수록 일찍 병든다는 사실도 확인된 것이다. 얼마나 일찍 병들기 시작할까. 남은 인생 중 병들어 있는 기간이 건강한 기간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대한 격차는 예상보다 컸다. 저소득층은 이 시기를 고소득층보다 최소 18년이나 일찍 맞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소득층 남성은 평균적으로 65세가 되면 건강한 상태인 ‘활동적 기대여명’보다 병 들거나 신체 기능이 저하된 ‘비활동적 기대여명’이 더 길어져 비중이 역전되는 때를 맞게 된다. 하지만 고소득층 남성은 한참 뒤인 83세가 되어서야 이 시기를 맞는다. 소득수준의 차이가 18년에 이르는 삶의 질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여성의 경우 격차는 더 커진다. 저소득층 여성이 이러한 ‘역전’을 맞는 나이는 48세다. 그러나 고소득층 여성은 69세에 이 시기를 맞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이는 21년, 평균수명의 4분의 1을 넘는 기간이다.

한 노인이 서울 종로구에 있는 고물상에서 모아온 폐지를 내려놓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여성의 경우는 격차 더 늘어나
아직 노년까지 20~30년을 남겨둔 젊은 세대에서도 소득에 따른 기대여명의 차이는 분명히 나타났다. 동갑내기 대학 동창인 35세의 직장인 여성 이재연씨와 강지민씨의 향후 기대여명도 소득수준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득 상위 50%에 들어가는 이씨는 남은 삶 중 14.9년을 비활동적으로 보낼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소득 하위 50%에 해당하는 강씨의 비활동적 기대여명은 21년이나 된다. 총 기대여명은 52.1년인 이씨에 비해 50.2년인 강씨가 더 짧다. 즉 소득이 적은 강씨는 6년을 더 골골거리며 살다가 2년 더 빨리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강씨는 지금의 소득 격차가 불러올 미래의 나비효과를 두려워했다. “계약직이라서 받는 스트레스에다 연차로 여름휴가도 못 갈 정도의 근무환경 문제, 이런 것들이 나중에 나이가 들면 건강상태로 다 드러난다는 얘기 아니에요.” 이씨 역시 도식적인 비교일 수도 있지만 소득에 따른 건강 및 삶의 질의 차이는 주변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친구 남편들 보면 골프라도 치면서 운동한다는 사람이랑 매일 야근한다는 사람이랑은 다른 게 분명하죠. 골프 자체가 얼마나 운동이 되는지를 떠나서 그런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보건사회연구원 우해봉 연구위원이 실시한 이 분석에서는 생애소득 중위수를 기준으로 상위소득계층과 하위소득계층 두 집단으로만 집단을 구분했다. 상·하위 소득집단이 각각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셈인데, 그런데도 양 집단 사이의 격차는 18년에서 21년까지 나왔다. 전체 집단을 보다 세분해서 비교할 경우 최상위 집단과 최하위 집단 사이의 격차는 이보다 훨씬 커지게 된다.

저소득층은 기대여명도 짧아
실제로 소득계층을 세분화한 분석에서 저소득층은 고소득층에 비해 총 기대여명도 크게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강영호 서울대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남성의 경우 소득수준 상위 20%의 기대여명은 하위 20%보다 9.1년 더 길었다. 여성 역시 고소득층이 저소득층에 비해 3.8년 더 오래 산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득 하위 20% 남성의 기대여명 67.9세는 1992년의 남성 전체 평균 기대여명인 68.2세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여성 역시 하위 20%의 기대여명 78.8세는 1999년의 여성 평균 기대여명 79.2세에 미달하는 수치다. 저소득층의 수명은 20년 전인 199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의 기대여명과 저소득층으로 분류되는 의료급여 수급자의 기대여명을 비교한 결과는 소득에 따른 건강상태와 수명의 격차를 잘 보여줬다. 남성 건보 직장가입자들의 기대여명 평균 74.8세에 비해 남성 의료급여 수급자들의 기대여명 평균은 55세로 19.8년이나 짧았다. 여성의 경우도 직장가입자(82.2세)에 비해 의료급여 수급자(71.6세)의 수명이 10.6년 짧았다. 북한의 2011년 기준 평균 수명인 남 65.1세, 여 71.9세에 비해서도 낮은 수치다.

문제는 이미 비활동적 기대여명에 들어간 노인이라고 해서 일을 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비활동적 기대여명이 시작됐다는 말은 병에 걸리거나 건강상태가 악화됐다는 것을 뜻할 뿐, 경제적인 활동을 멈춰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득 격차에 따른 활동·비활동적 기대여명의 격차가 삶의 질의 격차로 고스란히 옮겨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건강상태는 나빠졌지만 생계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 없는 노인의 비율은 더 높아지는 실정이다.

경기도 김포시의 한 노인요양원에서 요양중인 노인들이 복도를 오가고 있다. | 정지윤 기자

노후 건강 나빠도 일 못 그만둬
직장 퇴직 후 아들이 경영하는 고물상에 ‘재취업’한 김모씨(67)도 손목과 어깨 등 관절에 무리가 가지만 일을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이유? 돈 때문이지 뭐. 퇴직금으로 아들 사업 밀어주다가 쫄딱 말아먹어서 겨우 고물상이나 인수했는데 일손 구할 돈 없으니 나라도 나가야 되는 거 아녀.” 김씨가 관절염 등 갖가지 근골격계 질환으로 고생하기 시작한 지도 30년이 다 되어간다. “평생 감기처럼 달고 사는 거여. 젊었을 때 항만 하역일 하던 놈이 인자 늙어서도 고물일 하는 것모냥으로. 파스 붙이고 버티다가 너무 심하다 싶으면 침 한 번 맞는 거지.” 김씨와 함께 찾아간 한의원에서 20년 넘게 동네 주민들을 봐온 한의사도 말을 거든다. “돈 많은 사람들은 보약 지어 먹으러 오지, 침 맞으러는 안 와요. 운동하다 다치면 올까. 그나마 일해서 수입이 있어야 침이라도 맞지. 정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병원 안 와요.”

전문가들은 평균 수명이 선진국 수준으로 높아진 만큼 이제 후속적인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동진 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앞으로는 기대여명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며 “건강 형평성과 사망 격차를 개선하기 위한 체계적인 정책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영호 서울대 교수도 “의료급여 대상자와 지역가입자에서 기대여명 격차가 나타나는 것은 사회적 보호가 취약한 계층의 높은 사망률과 우리 사회의 극명한 양극화를 반영하는 것”이라며 “소득이나 재산 등 사회경제적인 차이가 기대여명에 더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이런 의료 격차를 줄일 정부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불평등에 직면한 지구촌

한국 밖의 세계로 눈을 돌리면 소득 격차를 포함한 불평등이 여전히 목숨까지 빼앗는 주범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올해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제18회 세계사회학대회에서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평등이 단순히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목숨을 좌우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4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의 이번 주제는 ‘불평등한 세계를 마주보기’였다.

‘불평등은 사람을 죽인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 <불평등의 킬링필드>는 대회 주제와 맞물려 큰 관심을 받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인 저자 예란 테르보른에 따르면 불평등의 ‘학살’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1990년에서 2009년까지 개방 정책으로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취약계층 사망률은 남성이 49%, 여성이 24% 증가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1990년에서 2008년까지 고졸 이하 학력의 백인은 기대여명이 3년 줄었다. 흑인의 경우는 12년에 달했다.

소득수준 외에도 다양한 차원의 불평등이 수명과 삶의 질에 직결된다는 연구도 여럿 나왔다. 헝가리에서는 대졸 이상과 초졸 미만의 사망률을 비교한 결과 초졸 미만 집단에서는 매해 10만명당 2580명의 초과 사망이 보고됐다. 개인적 성취의 차이도 수명에 영향을 미쳤다. 오스카상을 받은 배우들은 후보에 올랐지만 고배를 마신 배우들에 비해 평균 3년 더 오래 살았다. 노벨상 수상자들 역시 수상하지 못한 후보자에 비해 평균 수명이 더 길었다. 불평등이 심해지면 사회 전체의 신뢰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높은 수준으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한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는 타인을 믿을 수 있는지를 묻는 조사에서 60% 이상이 ‘그렇다’고 응답한 반면 브라질에서는 같은 조사에 3%만 ‘그렇다’고 답했다.

불평등이 개선되기는커녕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데 대해 사회학자들은 사회와 생활세계의 파편화를 이유로 든다. 소득이나 교육 수준에 따라,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구분에 따라 삶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서로가 직면한 불평등의 문제를 공감할 수 있는 폭이 크게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테르보른 교수는 “가난한 사람들은 불평등으로 인해 빈곤의 계곡에 갇힌 채 올라가는 길목이 차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중산층뿐만 아니라 불평등에 직면한 사회의 폭넓은 계층 전반에 걸쳐 평등을 요구하는 운동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계사회학회 부회장인 라구엘 엘리자가 멕시코 국립자율대 교수도 “‘사람’이 억압받는 동안 자본은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힘의 관계가 자본에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노동자들은 협상력을 잃고 불평등에 직면했다”며 “사회 구조가 파괴됨에 따라 세계 인구 대부분이 간신히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상태를 벗어날 수 있도록 생활조건을 개선하고 가족과 지역사회를 재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