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새정치연합이 자랑하는 200만 당원은 선거 때 세과시용, 당원협 활동도 거리에 현수막 내걸기가 고작
한 철학자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투표를 할 때만 주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라고 혹평한 바 있다.
시민들이 평소에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인터넷에 글을 올리거나 거리의 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일종의 정치 참여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성향과 가장 어울리는 정당의 풀뿌리 조직에 참여해 활동하는 것이 참정권의 의미를 가장 잘 살리는 방식이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정당의 풀뿌리 조직이 일상적으로 시민들의 의사를 수렴하고, 광역 시·도당, 중앙당과 소통하고 있다면 시민들이 선거가 끝난 뒤에도 내버려졌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수치상으로 볼 때 한국의 양대 정당(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대중정당처럼 보인다.

7월 17일 서울 동작구 남성역 인근에서 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 선거운동원들이 유세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민 9명 중 한 명꼴로 당원 자격
중앙선관위의 ‘정당의 활동개황 및 회계보고’ 자료에 따르면, 2012년 말 기준으로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현 새정치연합)의 당원은 각각 약 247만, 213만명으로 나온다. 같은 기간 양당을 포함해 특정 정당에 가입한 사람의 숫자는 478만여명으로, 이는 선거권을 가진 전국민의 11.8%에 해당한다. 국민 9명 중 1명은 당원 자격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의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회원 수가 1만3000명이라는 점과 비교해보면, 양대 정당의 조직이 제대로만 갖춰져 있다면 정치권과 시민들이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선거 시기가 아닐 경우 정당의 풀뿌리 조직(당원협의회)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길거리에 이따금 내걸리는 현수막이 거의 전부다.
오신환 새누리당 부대변인(43·서울 관악을 당협위원장)은 “선거 기간에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당원들이 모여 오가는 시민들에게 정책 홍보물을 나눠주고, 지역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유권자들을 만난다. 하지만 평시에 이런 활동을 체계적으로 하는 당협은 어느 당을 막론하고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의 당원협의회는 사실상 차기 국회의원 후보인 당협위원장의 활동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2005년 정당법 개정으로 국회의원 선거구 이하 단위에서의 지구당은 금지되고, 지역 당원들의 ‘임의조직’인 당원협의회가 생겼다. 당협은 정당의 정식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당협의 이름을 걸고 정치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제약을 받는다. 정당법 37조에 따르면 당협 사무실을 내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이 때문에 당협위원장의 개인 사무실(국회의원이 당협위원장인 경우 후원회 사무실)이 사실상의 당협 사무실로 사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이 ‘당협 사무실’의 운영비는 당협위원장의 호주머니에서 나오기 때문에 자연스레 당협위원장의 활동이 곧 당협 활동의 거의 전부가 된다.
당협위원장 당선시키는 데 온신경
현실의 당협위원장들은 굉장히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한 수도권 당협위원장의 경우 하루종일 4군데 행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아침에는 지역 체육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했고, 점심 때는 노인정에서 노인 배식봉사를 하면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지역 통장 회의에 참석하고, 저녁에는 당원이 위주인 산악회 멤버들과의 술자리로 하루를 마쳤다. 문제는 이런 활동이 풀뿌리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이라기보다는 ‘개인 활동’에 가깝다는 점이다.
한국의 지구당 제도 변천사를 연구한 하네스 모슬러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교수(38)는 지구당 제도 폐지 당시의 논의과정을 설명하며 “미국식 선거전문가 정당으로 (논의의) 방향이 기울어짐에 따라 지구당 폐지로 귀결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풀뿌리 정당조직이 일상적 정치 선전보다는 당협위원장의 당선에 집중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는 것이다. 지구당 폐지 이후만 따져도 10년 가까이 정당의 풀뿌리 활동이 거의 봉쇄되다시피 했다. 당원들의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다 보니 ‘정치적 계급’은 시민과 더욱 멀어졌다는 것이 하네스 교수의 진단이다.
또한 하네스 교수는 정당 지역조직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 차세대 정치인 육성을 꼽았다. 현실의 양대 정당만 해도 2000년대 초반 486세대의 유입 이후 그 뒤를 이을 신진세력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하지만 지역 정치인들은 현행 정당제도 아래서는 신진세력을 당 내에서 키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한다. 오신환 부대변인은 “청년 정치인들이 풀뿌리 조직에서 활동을 시작해 점차 위로 올라가는 게 정석 코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청년세대의 취직 등 현실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순전히 자신의 시간과 돈을 쓰며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청년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 부대변인은 “내가 35살에 시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시의원 월급이 없었다면 시작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원협의회의 일상적인 정치활동에는 무엇이 있을까. 당에 따라, 당협의 상황에 따라 세부적인 것에는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2~3주에 한 번 정도 당협 운영위원회가 열린다.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의 경우 당협위원장과 광역·기초의원, 해당 지역의 읍·면·동 단위의 핵심당원 각 1명이 운영위원이 되는 게 일반적이다.

노동당 당원들이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역 인근에서 공휴일의 유급휴일화를 주장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 노동당 홈페이지
운영위원회에서 당협위원장은 중앙당과 광역 시·도당 회의에서 결정된 정당의 정치방침을 설명하고, 운영위원들은 자기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낸다. 대체로 현수막을 걸거나 시민단체와 연계해 캠페인을 벌이는 것들이다. 가끔씩은 자신이 속한 풀뿌리 단위에서 발생한 현안을 말하는 운영위원들도 있다.
하지만 특정 정당의 성향이 너무 강한 지역구의 경우, 이 정도의 정당 조직도 없는 경우도 있다. 여선웅 새정치연합 서울 강남구 의원(30)은 “새누리당의 세력이 너무 강한 곳이어서인지 지난 몇 년간 지역위원장이 제대로 없었다. 유력 정치인이 방문하지 않는 이상 당원 모임이 열린 경우도 거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면 새정치연합의 당세가 강한 곳에서는 당원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여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집회에 참석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 구의원은 풀뿌리 활동으로 만날 수 있는 계층이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지역 정치인들은 주로 낮시간에 유권자들을 만난다. 외부 활동이 가능한 경제력을 갖춘 주부나 은퇴자들이 지역 정치인들의 단골 손님들이다. 여 구의원은 “새정치연합의 경우 직장인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안아야 하는데 퇴근시간에 만나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직장인들은 주소지가 강남이 아닌 사람이 많다 보니 강남 지역위원회에서 힘을 모을 수 없는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통제’에 초점 맞춘 정당법이 활동 제약
진보정당의 경우 당원협의회 가입은 주소가 아닌 활동지(직장·학교 등)를 기준으로도 할 수 있다. 김상철 노동당 서울시당 사무총장(39)은 “거주지만 보고 지역정치를 할 경우 놓치는 사람들이 많다. 세입자들의 경우 2~3년 만에 주소지가 바뀌는 경우가 많고, 같은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들도 사는 곳은 제각각이다”라며 “선거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정치활동을 감안한다면 주소지와 활동지 중 지역 당원협의회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했다.
김 사무총장은 소수 진보정당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양대 정당이 수십년간 쌓아둔 벽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10년간 진보정당 활동가들도 기성 정치인들처럼 지역 행사를 다니고, 조기축구회와 산악회에 가입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인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결국 당원으로 많은 사람을 조직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사무총장은 “노동당 당원들은 서울 곳곳에 민중의집을 운영하는 등 풀뿌리 정치에 누구보다도 열의를 보여왔지만, 원외정당이라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며 “풀뿌리 단위에서부터 정치적 다양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지금의 국고보조금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네스 교수에 따르면 1963년 정당법이 제정된 이후로 제도의 변화과정은 정당의 활동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상 풀뿌리 정당조직을 무력화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러한 정당법의 변천사는 “나약한 지역 정당조직”을 남겼고, 일상적인 정치활동의 부재가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민주의식의 발전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게 하네스 교수의 지적이다.
한 정당 당협위원장은 “정치권에서 오픈프라이머리 제도나 모바일 정당과 같은 큰 차원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보다 앞서 풀뿌리 정치를 발목 잡는 현행 제도부터 고칠 생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당의 풀뿌리 활동이 실종된 상황에서는 어떤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핵심 당원을 쥐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 당심과 민심을 좌지우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