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작가의 유년시절 슬픔

한 작품에 나타난 주인공이나 화자의 시선을 그대로 작가 자신의 시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한 해석이지만, 때로 작가는 자신의 가장 아픈 상처, 가장 밑바닥의 이야기를 끄집어내 작품으로 써내려가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 작품 속에 그려진 아픔과 고통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그 핍진성과 구체성으로 인해 그 어떤 허구보다 생생하고 강력한 힘으로 다가오곤 한다. 그런 면에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작 <유리동물원>은 가족에 대한, 특히 누이에 대한 작가 자신의 애틋함과 그리움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많은 이들로부터 ‘가장 미국적인 극작가’라고 평가받는 테네시 윌리엄스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섬세하게 자신의 삶을 희곡 텍스트로 빚어낸 인물이다. 특히 <유리동물원>에서는 유년시절 작가 자신이 겪었던 개인적인 상처가 두 인물을 통해 복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태생적으로 예민하고 내성적인 데다 어린 시절 병을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했던 윌리엄스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내내 집에 처박혀 지냈다. 종일 집에서 책만 읽으며 지내던 윌리엄스에게는 누이 로즈가 유일한 친구이자 벗이었으나 후에 로즈는 정신이상으로 요양원에 보내졌다.

연극 <유리동물원> | 명동예술극장 제공

얼마 전 막을 올린 한태숙 연출의 <유리동물원>은 주인공 로라뿐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의 상처 입은 내면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실제로 이 작품의 주인공 윙필드 가족은 모두 현실 부적응자로서, 현실에 대한 도피처로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다. 태생적으로 우아하고 명랑한 성격을 타고났지만, 남편이 집을 나간 뒤 두 아이와 어렵게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어머니 아만다는 지나가버린 과거의 환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여인이다. 별다른 직업 없이 창고를 전전하는 노동자 톰은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간만 나면 영화관으로 달려가 현실을 잊고자 한다.

내성적인 성격에 다리 한쪽이 불편한 데 대한 트라우마로 바깥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로라는 항상 집안에 틀어박혀 낡은 축음기를 틀어놓고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살아간다. 자신이 모은 유리 동물들을 매일 쓰다듬고 닦으면서 자기만의 ‘유리동물원’을 가꾸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이다. 투명하게 빛나는 유리동물원은 두려운 현실에 맞서 로라 스스로가 만들어낸 그녀의 세계를 상징하지만, 금방 깨지기 쉬운 유리의 속성과도 같이 현실을 막아내기에 그녀의 환상은 너무나 연약하고 위태롭다.

연극 <유리동물원> | 명동예술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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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 촛불을 끄고 막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로라를 향한 극중 화자 톰의 독백은 어둠 속에 버려둔 누이에 대한 테네시 윌리엄스 자신의 죄책감과 그리움이 중첩되어 더욱 애틋하고 안타깝게 다가온다. 전체적으로 매우 어두운 무대와 콘트라스트가 강한 조명빛은 애써 밝은 척 살아가고자 하는 윙필드 가족 내면의 깊고 어두운 심리를 무대 위에 말없이 드러내고 있다. 특히 공연 내내 라이브로 연주되는 첼로의 낮고 떨리는 저음은 인물들의 흔들리는 내면과 깊은 상처를 대신 이야기해주는 또 하나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양면적인 모습을 가진 어머니 아만다 역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김성녀가 맡았고, 이 외에 정운선, 이승주, 심완준 등 젊지만 단단한 존재감을 보여준 배우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8월 6~30일, 명동예술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