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경제]허(Her) - 실체는 없는 ‘가상의 관계’

세상에서 내 마음을 한 치 다름없이 알아주는 연인이 있을까. 나만을 사랑하며, 나만을 이해하고,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사람.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허’(Her)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만드는 로맨틱 코미디다. 테오도르(호야킨 피닉스 분)는 대필작가다.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준다.

정작 자신은 아내와 이혼을 앞두고 있다. 미련이 남아서 이혼 도장을 찍는 것을 미루고 있을 뿐이다. 어느날 인공지능을 갖춘 운영체제(OS)를 탑재한 기기를 구입한다. 외관은 스마트폰처럼 생겼다. 음성으로 자신의 일정을 관리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여성의 목소리를 가진 이 인공지능은 자신을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로 불러달란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감싸준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가상의 섹스까지 나눈다. 그런데 테오도르는 곧 공허함에 빠진다. 이 사랑은 정상적인 것인가, 그리고 만질 수 없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스칼렛 요한슨은 사만다의 목소리 연기만으로 로마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전문지 롤링스톤은 “달콤하고, 섹시하며 진심어린 목소리”라고 호평했다. 테오도르와 인공지능 사만다의 관계는 주인과 소유물 간의 관계가 아니다. 인격체 대 인격체 간의 대화다. 사만다는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통해 테오도르를 본다. 그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테오도르와의 관계가 진행되면서 사만다도 고민이 깊어진다. “나는 매 순간 진화하고 있어요.

사람들처럼 다양한 감정을 갖고 싶어요. 그런데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사만다는 자신을 대신할 현실의 여성을 찾아 테오도르에게 보낸다. 자신을 대신해 육체를 느껴보라는 것이지만 테오도르는 감정을 이입시키지 못한다. 사만다는 가상의 여인이다. 목소리만 있을 뿐 실체는 없다. 테오도르는 현실의 아내에게 얻지 못했던 정신적인 만족감을 가상의 그녀에게서 찾는다. 인터넷과 전산시스템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신용카드는 이미 일반화됐다. 식사를 한다. 그리고 신용카드를 꺼내 긁는다. 동전이나 지폐가 오가지 않는다. 옛사람들이 봤다면 기절할 만한 거래다. 사이버머니도 출연했다. 싸이월드에서 미니홈피를 꾸미는 데 쓰는 도토리가 대표적이다. 항공기를 이용하거나 카드를 사용하면 쌓이는 마일리지도 있다. 사이버머니는 가상화폐로 발전하고 있다. 비트코인이다. 디지털 단위인 ‘비트’(bit)와 ‘동전’(coin)을 합친 이름이다.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2009년 카모토 사토시가 만들었다고 알려졌지만 당사자는 부인하고 있다. 비트코인은 컴퓨터에서 ‘채굴’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제시된 복잡한 수학문제를 자신의 컴퓨터로 풀면 비트코인을 얻을 수 있다. 채굴이 싫으면 비트코인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사야 한다.

2012년만 해도 1비트코인당 가치는 5달러였지만 2013년 말에는 1200달러를 뛰어넘으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아마존, 월마트, 메이시스 백화점 등에서는 비트코인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 파리바게뜨 인천시청역점이 국내 최초로 비트코인 결제를 허용했다. 구글 출신 찰리 리가 2011년 개발한 라이트코인도 가상화폐다. 금화와 달리 일상생활에서 주로 쓰이던 은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피어코인, 네임코인, 월드코인, 호보니클스, 그리드코인, 파이어플라이코인, 제우스코인 등도 가상화폐다. 가상화폐의 단점은 해킹이 쉽고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나를 사랑하는 인공지능이 나 외에 또 다른 사람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면? 동시에 사랑하는 숫자가 600명이 넘는다면 당신은 인공지능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영화는 그것을 묻고 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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