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눈물겹도록 엄숙한 광화문 ‘해머링맨’

거대한 해머링맨은 오늘날 쉼 없이 노동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굽어보며 천, 천, 히 망치질을 한다. 그 밑으로 온종일 몸으로 일하고 수많은 ‘갑’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면서 고도의 능숙한 ‘내면 연기’를 마친 사람들이 분주히 걸어간다.

서녘으로 해가 저무는 광화문 네거리. 거대한 빌딩 숲 사이로 한 남자가 망치질을 하고 있다. 거대한 빌딩만큼이나 엄청난 신장을 가진 남자이건만, 그의 망치질은 고독해 보인다. 느리지만 완강한 힘으로, 끝없이 망치질을 반복한다. 무려 22m에 달하는 크기이고 무게는 50톤이 넘는다. 1분17초마다 한 번씩 천, 천, 히 망치질을 하는 남자.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는, 흥국생명 빌딩 앞의 ‘해머링맨’이다. 2m도 안 되는 수많은 사람들, 하루 종일 고된 일을 마치고 퇴근길에 나선 사람들이 22m 크기의 해머링맨 밑으로 분주히 걸어간다. 개미 같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해머링맨은 망치질을 한다. 하루의 고된 노동을 위로하는 듯, 그의 망치질은 속도를 부채질하기보다는 힘겨운 육체를 쓰다듬는 듯 느껴진다.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앞에 설치된 작품 ‘해머링맨’ | 정윤수

현대사회 마음의 영역까지 ‘노동’과 연결
‘피로사회’, ‘위험사회’, ‘감시사회’, ‘소비사회’, ‘단속사회’, ‘낭비사회’…. 요즘 출판계의 트렌드가 되고 있는 단어들이다. 이 중에서 위험사회나 소비사회는 울리히 벡이나 장 보들리야르에 의하여 오래 전에 학술적 시민권을 얻은 용어들이지만,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시작으로 하여 최근 ‘∼사회’ 식의 제목을 단 책들이 나오다 보니 한데 묶여 소개되기도 한다. 이 많은 ‘∼사회’를 한마디로 줄인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노동사회’라고 부르고 싶다. 노동! 쉼 없이 일하는, 그렇게 일해야만 하는 사회, 그로 인하여 숱한 문제들, 그러니까 ‘위험’, ‘감시’, ‘소비’, ‘낭비’, ‘피로’ 같은 말들이 파생되는 것, 곧 ‘노동사회’가 아닐까.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 즉 마음의 영역마저도 결국 ‘노동’과 연결된다. 최근 들어 사회과학 연구에 있어 ‘감정’, ‘정동’, ‘정서’, ‘마음’, ‘열정’ 같은 단어가 일정한 의미를 띠면서 중요하게 논의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많은 단어들은 다양한 학문적 역사성과 지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데 묶어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최근의 경향으로 보자면 ‘감정’이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감정사회’ 혹은 ‘감정노동’이라는 말은 학계뿐만 아니라 일상의 영역에서도 곧잘 쓰이고 있다. 특히 대형쇼핑몰이나 프랜차이즈 카페 같은 곳에서 온몸이 소비자에게 노출된 채 노동을 해야만 하는 경우 ‘감정노동’이란 말의 무게는 더욱 둔중해진다.

감정노동은 소비자에게 노출된 채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강제로 억제하고 조절하는 경우를 우선 말하지만, 이 분야의 선구자인 앨리 혹실드의 <감정노동>에 따르면 현대의 노동행위 자체가 자신의 내면을 회사 또는 사회가 원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억제하고 조절하는 ‘내면 연기’(deep acting)의 연속이다.

신체가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억지로 웃으면서 일을 해야만 하는 노동만이 아니라 일반 사무실이나 개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 역시 ‘갑’이 원하는 행동, 표정, 심지어 감정까지 미리 숙지하여 그에 따른 ‘내면 연기’를 수행하는 것, 그렇게 수행하다 보니 어느새 ‘연기’와 ‘자아’가 혼동되기까지 하는 것, 그리하여 인간의 내밀한 감정마저 ‘갑’의 기준에 따라 기획되고 통제되는 것, 그것이 ‘감정노동’이다. 혹실드는 단순히 감정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 것, 일종의 감정 조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까지 진단하였다.

<감정자본주의>의 저자 에바 일루즈도 같은 맥락에서 사회(곧 국가와 자본)가 감정의 생성·관리·표현 등에 관련된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때 행위자(곧 노동자)는 이러한 흐름에 부합하는 감정을 스스로 소유하거나 최소한 그 흐름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감정 ‘연기’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갑’ 기준에 따라 기획·통제되는 감정노동
다시, 해머링맨을 본다. ‘비동시성의 동시성’, 즉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살아온 전 세계의 다양한 삶들이 단일한 문화세계 속으로 급속히 빨려들어가는 시대를 증언하기 위하여 수많은 미술가들이 동일한 형태의 조형물을 세계 주요 도시에 설치하고 있다. 거대한 거미 작품으로 유명한 루이스 부르주아, 빨래집게나 숟가락 따위를 거대한 크기로 재현하는 클래스 올덴버그 등이 대표적이거니와, 이 해머링맨 역시 전 세계 6개 나라의 11개 도시에 설치되어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스위스 바젤, 미국 시애틀, 노르웨이 릴레스톰, 일본 나고야, 그리고 서울 한복판 등이다. 조너선 보로프스키가 1979년에 조각작품으로 선보였다가 어느새 세계 곳곳의 랜드마크로까지 격상되었다. 최초의 조각작품 제목은 ‘노동자’였으나 곧 ‘망치질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 해머링맨은 하루 750회. 연간 27만3750회의 망치질을 한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물끄러미 서서 바라보면, 해머링맨의 동작은 저항이나 분노보다는 눈물겨울 정도로 엄숙해 보인다. 19세기 초엽, 스페인의 타락과 혼란을 거대한 괴물로 상징하여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처럼, 거대한 해머링맨은 오늘날 쉼 없이 노동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굽어보며 천, 천, 히 망치질을 한다. 가까이 가서 올려다 보면, 감정조차 없어 보인다. 그 밑으로 하루 종일 몸으로 일하고 또 세상의 수많은 ‘갑’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면서 고도의 능숙한 ‘내면 연기’를 마친 사람들이 분주히 걸어간다.

<정윤수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