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사람]올곧지만 따스한 선비의 숨결, 안동 농암종택

농암종택은 마음과 정신이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공간이다. 고요한 마음과 맑은 기운으로 정신이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우리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다.

‘고향인 농암에 올라보니 낯익은 풍경이라. 눈이 어두운데도 오히려 더 잘 보이는구나. 인간 세상이 변한다고 자연이야 변하겠는가. 바위 앞에 펼쳐진 자연들이 마치 어제 본 것처럼 반갑구나.’

이현보가 말년에 지은 <농암가(聾巖歌)>를 보면 농암종택이 그려진다. 변하지 않는 농암의 자연, 그 품속에 자리잡고 있는 게 농암종택 아니던가. 맑은 새벽, 분강촌으로 가는 가송 골짜기로 오른다.

분강촌이라 불리는 농암종택의 새벽.

물안개 걷히니 담백한 수묵의 풍경
아침 물안개가 자욱하게 고택을 덮는다. 밝은 햇귀가 오르는 분강촌의 빛깔은 동양화 한 폭처럼 신비스러우며 점잖다. 젊은 선비의 도포자락 같은 푸르스름한 물안개를 한 자락 걷어내니, 담백한 수묵의 풍경에 금세 천연한 아침 빛이 돋는다. 발 아래로 흐르는 반짝이는 빛은 바로 낙동강의 물길이다. 눈부신 빛 가운데 선 두루미가 마치 젊은 선비의 모습처럼 고결하고 의젓하다. 물길을 따라 낙동강변의 하얀 모래밭이 펼쳐져 있다.

열두 폭 병풍의 기암절벽에 피어난 선홍빛의 철쭉이 깔을 뽐낸다. 분강촌(汾江村)은 <어부사>를 쓰고 강호문학을 대표하는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종택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깊은 산 아래 순한 물길을 찾아 든 이후 어언 6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선조들이 그러하였듯이, 지금 종택을 지키는 종손 역시 이 산골짝 깊은 자리에 새 터를 마련하였다. 지금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에 있지만 본래는 더 하류 쪽인 도산서원 근처 부내라는 곳에 있었다. 안동댐 건설로 본래 종택이 있던 분천마을은 1976년 수몰되었다. 그리고 1996년 이성원씨가 이곳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 마을에 새로운 터를 잡았고,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2007년에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재이건되면서,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 분강서원, 애일당, 농암각자 등 농암 선생의 각종 문화재를 한데 모아 분강촌으로 거듭났다. 현재 종택은 후손들이 살면서 안채를 제외한 건물들과 분강서원 등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사붓사붓 물길을 따라 오르면 아름다운 강변마을 올미재에 농암종택이 있다. 청량산 줄기가 만들어내는 협곡을 끼고 흐르는 강 주변, 단애(斷崖)와 은빛 모래밭이 어우러지는 초여름의 풍경은 청량하여 기운이 생기를 북돋운다.

‘조상의 유업을 잇는다’는 뜻의 긍구당.

종택을 감싸 안은 산 병풍
강줄기를 따라 난 좁은 길을 따라 휘돌아 나가자 분강촌이 나타났다. 종택은 앞섶을 막아주고 뒤로는 과히 높지 않은 산병풍이 종택을 감싸안은 형국이다. 어귀부터 종택과 분강서원이 널찍한 사이를 두고 펼쳐지고, 안쪽 산기슭에 들어앉은 애일당과 강각(江閣)이 멀찍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은 완전히 세속과 절연되어 있는 형국처럼 들어앉아 있다. 허나 강을 두고 산 깊이 자리했으나, 전혀 쓸쓸하거나 적막하지 않다. 깊으나 자연과 가까우며, 비어 있으나 비어 있지 않은 넉넉함이 드러난다. 그 강가에 터를 잡고 산 아래 자연의 큰 둘레를 지어 사람이 어우러지니 어색하지 않고 가득 차며 모자람이 없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대갓집 안마당이 널찍하다. 문을 열고 들어섰으나, 산이 병풍처럼 집을 감싸 안고 강 역시 집으로 들인 듯 창을 두고 돌아 나간다. 물줄기의 흐름과 산등성이의 경계가 허물 없어 또 한 줄기로 어우러진다. 일맥상통의 품으로 기운이 넘친다.

저 강을 따라 흐르는 물길은 자연과 벗하며 풍류를 즐기던 그 시대의 정신이었다. 농암고택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대문 정면에 서 있는 별채 ‘긍구당’(肯構堂)이다. 긍구당이란 당호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잇는다’는 뜻이다. 고려시대 때 농암 선생의 고조부가 지은 건물로 작고 소박하지만, 앞면에 넓은 마루가 시원한 건물이다. 한껏 치켜올린 팔작지붕은 뒷산자락의 산세와 딱 맞게 어우러져 어엿한 자태를 선뜻 보여준다. 농암은 이 긍구당에서 태어나 여기서 세상을 떠났다.

농암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분강서원.

긍구당의 누마루에 앉으니 수직으로 뻗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부드러운 산허리, 굽이치는 낙동강의 물결이 한눈에 들어온다. 퇴계 이황이 오가며 ‘도산십이곡’을 지었다는 ‘예던 길’(시조에선 ‘녀던 길’로 표기됨. 진리의 길이라는 의미로 쓰였다)과 강물이 아련하게 내려다 보인다. 애일당(愛日堂)은 그 끄트머리 산기슭에 있다. 농암이 구순 노인이던 부친과 숙부·외숙부를 위해 효심을 담아 지었는데,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뜻에서 ‘애일당’이라 하였다. 애일당 앞 담장에 면하여 담장 아래는 ‘농암각자’ 바위가 돌축대 위에 세워져 있고, 강 아래를 바라보며 새로 지은 누각 ‘강각’이 솟아 있다.

이제 다시 흐르는 강이 흐르고 퇴계의 걸음을 따라 많은 이들이 강가의 길을 걷는다. 멀리 일엽편주 흐르는 그 강가에서 이름 없는 어부처럼 고요히 물결을 바라보다 보면 시름이 잦아들까. 세월의 경계를 넘어 흐르는 강물에서 우리는 자연 안에서 편안해지는 자아를 경험한다. 농암 선생은 강물에 작은 배를 띄워두고 세상사를 다 잊으니, 그 평안한 속내에 날이 가는 줄을 몰랐다고 한다.

농암종택은 마음과 정신이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공간이다. 고요한 마음과 맑은 기운으로 정신이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우리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다. 선조들에게 집은 삶의 공간임과 동시에, 그 자체가 인생의 철학을 세우는 바탕이었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자리였다. 세파에 젖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참됨은 우리 민족이 지닌 고유한 심성이다. 일상의 공간에 햇살을 들여 따사로운 기운을 담고 정신을 깨우는 바람을 드나게 한 것 역시 자연과 철학이 배어 있는 우리 선인들의 삶이다.

고결한 선비의 숨결이 느껴지는 종택의 모습.

고요함이 깃든 그윽한 아름다움
그렇게 분강촌을 한가로이 거닐다 보면, 번잡스럽지 아니하고 넉넉하나 분에 넘치지 않는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 절대 평안의 고요. 극치의 아름다움이 내는 소리는 고요이다. 누가 고요를 아는가? 소란스러움에 익숙한 현대인들도 이 공간에 들어서면, 어느 순간 고요한 평안의 순간을 만난다. 순리대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강물 소리, 새벽을 깨우듯 지저귀는 산새 소리, 키 작은 풀벌레의 소리는 고요를 흩트리지 않는다.

그 소리들은 숨가쁘지 않으며 고결한 선비의 숨결처럼 차분하다. 수양이 잘 된 번듯한 선비의 모습처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부끄러움을 아는 자태다.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소요하는 농암 선생의 모습을 보고 옛 사람들은 신선과 같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길에서 만난 사람

올곧으면서도 따스하고, 욕심 없이 담박하면서도 멋이 넘치는, 자유롭고 살가운 선비, 농암 이현보의 삶. 효성과 지조, 그리고 자연을 노래하는 문학적 풍류를 보여주었던 선인의 삶을 돌아보는 여정은 조상의 숨결을 접하며 우리의 뿌리를 확인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다.

<글·사진 이강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