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인간’

극단 고래는 작가 겸 연출가인 이해성이 2010년에 창단한 극단으로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 그리고 사회적 약자와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담은 작품을 꾸준히 올려오고 있다. 1992년 데뷔 이후 <남자충동> <여행> <오레스테스> 등의 작품에서 꾸준히 배우로 활약해왔던 이해성은 200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남편을 빌려드립니다>란 단편으로 등단한 이후 신작희곡페스티벌에 선정된 <고래>를 통해 작·연출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살> <빨간시> <사라지다> 등의 작품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작가로서 경력은 그리 길지 않지만, 이해성의 작품은 치열한 문제의식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진솔한 공감을 보여주면서 잔잔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살>은 후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삶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으며, <빨간시>는 몇 년 전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온 작가 이해성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쓰고 올린 작품이었다.

연극 <고래> / 극단 고래 제공

이렇듯 꾸준히 타자의 입장, 타자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온 작가 이해성과 극단 고래의 시선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연극 <고래>가 올 봄, 극단 고래에 의해 다시 한 번 무대에 오른다. 이 작품은 1998년 6월, 무장간첩 9명을 태우고 동해에 침투했던 북한 잠수정이 어망에 걸려 표류하다가 결국 국군의 추격을 받고 간첩 9명 모두가 집단 자살했던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실제 일어났던 남북한 간의 미묘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고래>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깊은 바다 속, 쪽방 같은 잠수정 속에 갇혀 남한과 북한 어느 쪽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9명의 인간이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극중 뚜렷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인물들이 논하는 거대담론들은 오히려 그들이 나누는 신변잡기나 농담보다도 못한 공허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삶과 죽음의 순간 앞에서 이쪽과 저쪽의 구분,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거품처럼 사라지는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그토록 치열하게 대립했던 인물들의 말과 주장은 사라지고, 죽음과 삶, 실존에 대한 문제만이 깊고 고요한 침묵 속에 남는다. 군복과 이데올로기라는 껍질을 벗고 나면 다들 이렇게 약하고 안타까운 인간들이라는 것을 전하는 듯하다.

연극 <고래> / 극단 고래 제공

문화내시경

잠수정을 타고 넘어온 무장간첩들이라는 극의 설정상, <고래>에서는 오로지 남자배우들만 모여 만들어내는 거칠고 에너지 넘치는 앙상블을 만날 수 있다. 잠수정이라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대립과 격정적인 에너지는 극의 주제와도 이어지면서 시종일관 빽빽한 밀도감을 느끼게 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극단 미추와 국립극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온 배우 서상원과 극단 백수광부의 간판배우로 활약하고 있는 박완규 등 단단한 중견배우들과 함께 극단 고래의 젊고 의욕 넘치는 배우들이 모여 초연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앙상블을 보여준다. 4월 17일~5월 4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