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역단체 17곳 중 서울ㆍ인천 등 2곳만 유일하게 시행…
기초단체도 230곳 중 20여 곳 외에는 대부분 ‘시늉만’
서울시는 지난해 4월부터 ‘경로당에서 생산한 꼬부랑 콩나물 마을공동체 식당 운영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주로 노인들로 구성된 은평구 주민들은 서울시로부터 2억3000만원의 예산을 배정받아 은평구에 있는 한 건물을 임대했다. 주민들은 내부 인테리어·전기·가스·닥트 공사 등의 리모델링을 통해 건물을 새 단장한 뒤 콩나물국밥 식당을 오픈했다. 식재료는 경로당에서 기른 콩나물을 사용한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 식당은 월 평균 1400만원의 매출을 올리는 등 노인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 또 65세 이상 노인에게는 국밥 가격을 20% 할인해주는 등 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주부 김미선씨(가명)는 요즘 성북구청에서 운영하는 예산학교를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예산학교를 수강했지만, 이제는 반드시 수료해서 참여예산위원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것이 김씨의 각오다. 나와 내 이웃이 제안한 사업이 참여예산 사업으로 선정돼서 시행되면 보람을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북구에서는 최근 일반 주민에게 재미 없고 딱딱하게 여겨졌던 예산학교 수강 신청자가 정원 50명을 초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수강생들도 고등학교 학생에서부터 70대 노인까지 다양하다. 그만큼 주민들이 지자체의 살림살이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증거다.
이것이 일반 주민에게는 다소 생소한 주민참여예산제(참여예산제)의 한 모습이다. 참여예산제는 지방자치단체장의 권한이었던 예산 편성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예산을 편성하고, 해당 사업에 대한 사후평가에도 참여하는 것이다.

염태영 경기도 수원시장이 2012년 9월 6일 ‘주민참여예산제 사업설명회’에서 시민들에게 예산 설명을 하고 있다. | 수원시 제공
단체장 관심사업이 참여예산 사업 둔갑
정부는 지난 2011년 3월 지방재정법을 개정해 지자체가 참여예산제를 의무적으로 시행하도록 했다. 하지만 현재 참여예산제다운 참여예산제를 시행하고 있는 광역단체는 극히 드물다. 광역단체 중에는 서울시와 인천시가 17개 시·도 중에서 유일하게 시행하고 있다.
서울은 2012년부터 500억원의 예산 범위 내에서 참여예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인천시는 재정적 여건이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지난해부터 참여예산제를 시행하고 있다. 예산규모는 100억원 정도로 실질적인 사업은 올해부터 진행할 예정이다.
이들 이외의 광역단체에서는 참여예산제가 법에 명시돼 있기 때문에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 등 다른 광역단체도 예산항목에 주민참여예산 사업으로 잡혀 있지만 사실상 광역단체가 편성한 사업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공약 등 해당 자치단체장의 관심 사업이 참여예산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시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 광역단체의 참여예산제가 ‘주민참여 없는 참여예산제’로 전락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참여예산제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반드시 하겠다”는 단체장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지자체에서 재정 관련 각종 정보를 주민들에게 투명하게 제공해야 하는 것도 단체장의 몫이다. 주민위원들이 재정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예산을 제대로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공무원들도 참여예산제가 예산 편성과정에서 필수적인 행정과정으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하승수 변호사는 “주민참여예산제의 정착은 실질적으로 주민에게 예산 편성의 권한이 주어질 수 있도록 지방정치시스템이 바뀌어야 가능하다”면서 “이렇게 지방정치가 바뀌기 위해서는 운영하는 주체인 단체장과 지방의회의 마인드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단체장이나 의원이 참여예산제 시행을 위한 아무리 좋은 조례안을 만들더라도 의회에서 반대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손종필 나라살림연구소 부소장은 “참여예산제에 주민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첫걸음은 다양한 정보개방”이라며 “지자체는 예산 편성 및 집행과정에 대한 적극적 정보공개를 통해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행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참여예산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방의회가 주민참여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지나치게 견제해서는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실제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의회와 주민참여위원 간의 힘겨루기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해 참여예산제로 확정된 사업을 서울시의회 문화관광위에서 일부 예산(53억원)을 삭감함으로써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일부지역 지방의회와 힘겨루기도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이호 소장은 “주민들이 참여해서 만든 사업에 대해 의회가 관련 예산을 삭감할 수는 있지만, 주민들이 의회의 권한과 위상을 침해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며 “주민들 스스로 뽑은 의회에서 주민참여예산제에 대해 지나치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표지이야기]주민 참여 빠진 ‘무늬만 참여예산제’](https://img.khan.co.kr/newsmaker/1070/20140408_1070_A21b.jpg)
참여예산제는 그나마 기초단체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기초단체의 경우도 전국 230개 시·군·구 중 서울 성북·서대문구, 인천 동구, 경기 수원시, 울산 북구, 광주 북구 등 20여 기초단체에서 실질적인 참여예산제를 시행하고 있을 뿐이다. 인천지역의 기초자치단체들의 경우 지방재정법 개정 이전부터 민·관이 참여하는 거버넌스가 구축된 것이 참여예산제를 시행하는 데 도움이 됐다. 현재 인천에서는 연수·남동·동구에서 참여예산제가 정착돼 있다. 특히 이들 지역에서는 지역 특색에 맞는 ‘맞춤형 참여예산제’를 시행하고 있다. 동구는 참여예산제를 취약계층인 청소년·노인·여성 분야에 한해서만 시행하고 있고, 남동구는 참여예산위원회에서 구청의 예산 편성을 사전에 심의한다. 서울에서도 성북·서대문·은평구 등에서는 참여예산제가 활발히 시행되고 있다. 이들 구에서는 참여예산제를 통해 자전거 보관소 확대, 마을버스 간이승차대 설치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참여예산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기초자치단체는 광주 북구다. 광주 북구는 지난 2003년부터 지금까지 주민들이 직접 구청 살림살이에 참여하고 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구청장 후보가 지방재정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참여예산제 도입을 공약했고, 당선되자마자 시민사회단체 인사 등이 참여하는 예산참여시민위원회를 구성, 12년째 운영해 오고 있다. 참여예산제 사업을 통해 ‘문흥동 근린공원에 클래식 소리나는 가로등 설치’(1400만원), ‘주차난 해소를 위한 공용주차장 조성’(3억원), ‘광주동초등학교 앞 어린이 통학로 확장공사’(7000만원) 등 작지만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