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부조달협정 개정안 논란 왜?

외국기업에 시장개방 확대 조치… 야당의 국회동의 요구 무시하고 강행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 개정안이 여야 대치정국의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11월 15일 이 개정안을 재가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민주당, 정의당 등 야권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민주당은 이 사안과 관련해 당내에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기까지 했다.

낯설게만 들리는 정부조달협정이라는 건 어떤 통상조약이며, 왜 정부와 야권은 이 개정안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걸까.

정부조달은 정부기관이 필요로 하는 물자나 기자재를 민간업자로부터 구입하는 것을 말한다. 이 분야는 ‘원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내국민대우 원칙의 예외분야로 무역의 자유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각국 정부가 국내 산업의 보호, 기밀유지 등의 이유로 외국 기업에 입찰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1월 27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시민사회단체들과 국회의원, 종교계·학계 인사들이 철도 민영화 반대 각계 원탁회의를 마친 뒤 100만인 서명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대통령 유럽순방서 언급 후 수면 위로
GATT 체제에서 정부조달시장이 완전히 닫힌 것만은 아니었다. 미국, 일본 등 23개국은 1979년 도쿄 라운드에서 출범한 정부조달협정을 통해 전체 정부조달시장 중 일부를 양허(개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우 한정적인 분야에 국한돼 시장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1996년부터 발효된 WTO 정부조달협정은 GATT 체제에 비해 개방 영역이 더 늘어났다. 구(舊) 협정이 포괄하지 못한 중앙, 지방정부기관 및 통신, 전력기관 등 정부 영향력 하의 공공기관의 물품, 서비스 및 건설 구매로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이번에 논란이 된 정부조달협정 개정협상은 협정문 개선을 중심으로 1997년 시작됐고, 2004년부터는 양허를 확대하는 협상도 함께 추진됐다. 수년간의 협상 끝에 2011년 12월 타결이 됐고, 지난해 3월엔 협정문안이 확정됐다. 이후 43개 정부조달협정 회원국은 개별적으로 국내 절차를 진행해 왔다.

세간의 관심에서 1년 8개월 가까이 잊혀졌던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박근혜 대통령이 유럽 순방 당시인 11월 4일 ‘한-프랑스 경제인 간담회’에서 한 언급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한국의 정부조달시장 개방에 대한 의사를 묻는 질문에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의 국내 비준을 추진 중인데, 이것이 되면 도시철도분야 진입장벽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지 하루 뒤인 11월 5일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고, 청와대는 11월 11일 브리핑에서 이 사실을 뒤늦게 언론에 알렸다. 대통령의 재가만 떨어지면 국내 비준을 위한 절차가 마무리되는 셈이다.

문제는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이 ‘철도 민영화를 위한 수순’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는 점이다. 철도 민영화는 수서발 KTX 노선의 운영을 담당할 자회사 설립 움직임으로 인해 휘발성이 높은 이슈다. 이명박 정부 당시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야권은 박 대통령의 재가에 앞서 국회 비준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과 이 개정안이 철도 민영화의 신호탄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11월 13일 의원총회에서 “박 대통령이 4일 공공조달시장을 외국 기업에 개방하겠다고 밝힌 것과 때맞춰 국무회의에서 철도 민영화를 위한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을 슬그머니 처리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국가 기간산업인 철도 민영화로 이어질 수 있어 국민에게 중대한 부담을 지우는 조약이기 때문에 국회 비준동의가 필요하다”며 “정부에 국회 비준동의안을 제출하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당 박원석 의원은 통상절차법을 근거로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의 국회 동의를 요구했다. 그는 “통상절차법에 국회는 서명된 조약이 통상조약에 해당한다고 판단할 경우 정부에 비준동의안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며 “박 대통령은 재가를 보류하고 국무회의를 통과한 안을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하지만 법제처 심사 결과를 근거로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이 국회 비준을 거칠 필요가 없다고 봤다. 법제처는 10월 10일 대통령령, 부령, 고시의 개정을 통해 개정된 내용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에 국회 비준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석한 바 있다. 정부는 또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은 통상절차법이 시행(2012년 7월)되기 전에 타결(2011년 12월)됐기 때문에 이 개정안에 통상절차법을 소급 적용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철도 민영화를 위한 수순’ 의혹 불러
정부는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을 철도 민영화와 연결시키는 것도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개정안 내용은 건설, 유지보수, 부품, 자재 장비조달 입찰에 해외 업체가 국내 업체와 동등한 조건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공기업 민영화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을 살펴보면 고속철도의 운영권을 외국 기업에 넘기는 것은 아니다. 또 고속철도 차량의 조달시장 역시 열리지 않았다.

경실련·참여연대 등 시민사회진영과 철도노조 등은 하지만 개정안이 발효되면 공공부문 민영화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공공기관의 경영권이 해외 업체로 넘어가지 않더라도 추가로 개방된 분야에서 상업적인 운영이 강화될 경우 공공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공공연구소 박흥수 객원연구위원은 “최근 공기업 민영화는 정부가 지분은 소유하되 사업권 불하 같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은밀하게 진행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11월 15일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에 대한 재가를 강행했다. 정부가 WTO 사무국에 기탁서를 제출하면 개정안 발효를 위한 국내 절차는 마무리된다. 현재로선 청와대가 야권의 요구대로 국회 비준 절차를 거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국회 비준 절차를 밟든 아니든 이번 사안에서 짚어야 할 대목은 박근혜 정부가 야권, 시민사회진영과 소통하려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의 처리방식이 맞는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안인 만큼 박 대통령이 재가한 이후 이를 알리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재가 뒤 열흘이 지나도록 이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박근혜 정부가 사회적으로 갈등이 되고 있는 현안을 대화로 풀려는 의지가 없다. 소통보다는 힘의 논리로 제압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지환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