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협동조합법 사각지대 ‘자활공제협동조합’

금융·보험업은 법 적용 제외…

설립 촉진목적 법이 오히려 기존조합 활동 제약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해밀자활공제협동조합의 조합원인 박진만씨(65)는 조합이 출범한 2008년부터 출자금을 내고 꾸준히 조합활동을 해왔다. 결식아동을 위한 도시락을 제공하는 사회적기업에서 포장 업무를 맡고 있는 박씨는 한 달 전 딸을 시집보낼 때 조합의 도움을 받았다.

“결혼 같은 큰일도 그렇고, 하다 못해 냉장고를 하나 바꿀 때도 돈 없는 사람들은 부담이 되는데, 조합에서 대출을 받으면 큰 도움이 된다”는 박씨는 “은행에서 돈 빌리는 건 꿈도 못꿀 일이었는데 은행보다 이자도 싸고 빌리는 것도, 갚는 것도 편하게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박씨는 매달 10계좌로 5만원씩 조합비를 내며 지난 5년간 조합에서 네 번 대출을 받고 또 상환했다.

지난 2월 열린 해밀협동조합 정기총회에서 조합원들이 안건을 처리하고 있다. | 해밀협동조합 제공

공제협동조합은 조합비를 거둬 긴급한 자금이 필요할 때 대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협동조합이다. 조합원의 절대다수는 자활사업에 참여하는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이다. 은행에서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지만 협동조합을 만들면 담보 없이 100만원 이내의 소액대출을 받을 수 있다. 각 조합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금리는 3%대 이하로 낮은 편이고, 상환기간 역시 상환액이 월 10만원을 넘지 않도록 조정된다.

박씨에게 조합은 사무적인 금전거래만 오고 가는 곳이 아니다. 박씨는 수시로 조합을 찾아 조합원들과 만나며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조합원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 같은 저소득층이어서 공감대도 쉽게 만들어진다. 출자금이나 대출액수로 따지면 일반적인 금융기관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조합원 수가 많지 않은 만큼 서로에 대한 신용 덕분에 상환을 포기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조합원과 출자금도 꾸준히 늘었다. 130여명이 모은 2500만원으로 시작한 조합이 현재는 270여명의 조합원들로부터 모인 1억여원을 출자금으로 운용하고 있다.

2012년 12월부터 시행된 협동조합기본법은 협동조합의 업무분야에 제한을 두지 않아 다양한 협동조합이 설립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기본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법적 실체가 불분명했던 협동조합들이 법적인 지위를 부여받게 됐다. 다만 예외적으로 공제협동조합만은 여전히 법 밖의 임의단체로 남아 있다. 금융·보험업종의 협동조합은 기본법이 적용되는 업종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다른 협동조합과는 달리 법의 사각지대에 놓이면서 새로운 조합원을 끌어들이는 게 힘들어졌다. 조합이 사업을 중단하고 청산하게 되면 조합원이 낸 출자금을 법적으로 보호받을 길이 만만치 않아졌기 때문이다. 박씨는 “지금까지는 함께 자활을 하면서 서로 잘 알고 믿는 사람들을 많이 가입시켰는데 누가 한 번씩 ‘뭘 믿고 돈을 맡기느냐’고 물을 때면 딱히 할 말이 없긴 하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또는 유사한 명칭 사용 못해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활발하게 활동해온 만큼 해밀협동조합 역시 법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활동이 위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올해 기획재정부가 입법예고한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이제 전국의 공제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이란 명칭뿐 아니라 그와 유사한 이름까지 쓸 수 없게 돼 조합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해밀협동조합의 김현숙 사무국장은 “협동조합 설립을 촉진하려는 취지로 제정된 법이 이미 법에 앞서 협동조합을 확산시켜온 공제협동조합 활동을 가로막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라는 정부의 권고가 있지만 소규모의 출자금으로 운영하는 공제협동조합이 전적으로 비영리적인 활동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설명이다.

공제협동조합은 지역자활센터 등 지역 조직과 긴밀하게 얽혀 있어 사회안전망을 확대하는 역할도 한다. 서울의 한 자활공제협동조합 조합원인 최모씨(54)는 조합과의 우연한 만남이 인연이 되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은 경우다. 최씨는 1년 전 살고 있던 월셋방을 옮겨야 할 사정이 생겨 이사를 앞두고 있었지만 이사 비용이 모자라 고민하고 있었다. 이웃의 소개로 조합에 가입하면 소액이지만 긴급자금을 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최씨는 조합을 통해 급전을 융통한 뒤로 조합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공공근로를 하며 생계를 꾸리던 최씨에게 조합과 연계된 지역자활센터는 직장을 소개해줬고, 현재까지 최씨는 이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최씨에겐 30대에 폭행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교도소에서 복역한 과거가 있다. 출소 후 전과자라는 꼬리표를 숨기려 애썼지만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에 의존해 알코올 중독에까지 이르렀던 최씨였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주량을 대폭 줄였다. “처음 조합에 가입할 때 돈이 없어서 5000원짜리 한 계좌만 넣고 하루라도 빨리 돈 빌릴 수 있는 날 되기만 기다렸다. 괜히 부끄러워 한동안은 조합원들 모이는 자리도 안 나갔는데 한 번 모임에 가보니 한 계좌만 넣었다고 무시하는 것도 없고, 다들 제 목소리 편하게 내는 분위기더라고.”

최씨는 출자 계좌를 10개까지 늘렸다며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협동조합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지역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이 설립된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쪽방촌 골목 전경. | 김기남 기자

자활센터를 중심으로 설립된 자활공제협동조합과는 달리 한 동네에 사는 지역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공제협동조합을 세운 경우도 있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의 지역단체인 동자동사랑방을 중심으로 설립된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 역시 저소득층이 대부분인 쪽방촌 주민들의 경제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세워졌다. 고령층이 비교적 많은 동네의 특성상 기초생활수급비나 폐지 수거를 해서 번 돈 가운데 일부가 매달 조합비로 들어오고, 돈이 필요한 또 다른 조합원에게 전해진다. 한 계좌에 5000원씩 출자해 모인 6300만원을 바탕으로 6700만원의 대출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만기에 제때 상환하는 비율은 71%에 달한다. 때때로 연체가 발생하지만 현재까지 상환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었다.

전국의 지역자활센터를 중심으로 설립된 자활공제협동조합은 현재 70곳 이상인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엔 동자동사랑방과 같은 지역 주민단체에서 설립한 조합은 포함되지 않아 실제로는 더 많은 수의 조합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협동조합들과는 달리 정부나 지자체에 등록돼 있지 않아 정확하게 집계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2011년 기준 자활공제협동조합에 가입한 조합원 수는 8272명으로 이들 조합의 출자금 총액은 17억3900만원에 달했다. 평균적으로 조합당 176명의 조합원이 3700여만원의 출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도 어려움
협동조합 가운데 금융·보험업종이 허용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부실화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멀게는 1997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 당시 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의 부실 정도가 심해지면서 퇴출 또는 합병 등의 조치가 내려진 바 있다. 이러한 금융기관 가운데는 상당수의 신용협동조합도 포함됐다. 2011년 부실 저축은행에 대한 영업정지 사태가 일어난 것도 금융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용인하는 여론이 힘을 얻은 배경이 됐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협동조합기본법 제정 이전부터 금융업 허용 문제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들었지만 공제협동조합이 난립할 경우 생길 금융사고 위험을 막기 위해 대체로 규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면서 “(한국의) 정책적 환경 때문에 현 시점에서 개정안에 금융·보험업을 허용하는 내용이 들어갈 여지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협동조합 관련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시각은 달랐다. 금융업 자체의 부실 위험성을 감안하면 공제협동조합을 법적 테두리 안에서 감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지적이다. 등록이나 인가 후 법인으로 계좌를 개설할 수 있는 일반 협동조합·사회적 협동조합과는 달리 공제협동조합은 법인이 아닌 개인이나 단체 명의의 계좌를 개설할 수밖에 없다. 공신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협동조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문제와 함께 법인격을 부여받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기존 공제협동조합을 다른 형태의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데도 현실적 어려움이 따른다. 정부가 권고하는 대로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할 경우 취약계층을 위한 일자리나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의 공익사업이 전체 사업의 40% 이상이어야 한다. 조합원 대부분이 취약계층에 해당하는 공제협동조합의 경우 소액대출을 위한 출자금 외에 공익사업을 위한 출자금을 추가로 거둬야 하는 형편이다. 금융업무를 주로 하는 신용협동조합으로의 전환도 대부분의 공제협동조합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서울이나 광역시에 지역 신협을 세울 경우 출자금이 3억원 이상, 단체 신협을 세울 때는 1억원 이상이어야 인가조건을 충족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각 산업별 산업진흥법에 따라 설치된 공제조합처럼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공제협동조합 설치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사회적경제연구센터는 ‘자활사업 협동조합 발전방안’ 보고서에서 “공제협동조합이 사회적 협동조합의 틀에 따라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선 소액대출의 금액 기준을 폐지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자활공제협동조합의 법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이수연 연구원은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협동정신을 근간으로 세워진 공제협동조합이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불합리한 면이 많다고 본다”면서 “근본적으로는 협동조합도 금융·보험업을 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지만, 여러 현실적 조건들 때문에 당장 개정이 어렵다면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인정하는 방식을 바꾸는 등 다양한 대책을 우선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