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이 만난 사람]“국정원은 필요한 조직, 이번 기회에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신기남 국정원 국정조사특위 위원장

얼마 전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신기남’이란 이름이 올라왔다. 민주당 신기남 의원이 ‘국정원 댓글 의혹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특위’ 위원장으로 선정된 직후였다. 인권변호사로, TV의 사회자로, 열린우리당의 의장으로, 한때는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으로 불리는 개혁파 탈레반으로 알려진 그가 이번엔 국정원 개혁의 중심 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동갑인 정동영 민주당 고문과 함께 개혁파의 주역으로 활약할 때는 매스컴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그였지만 지난 대선에선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친노 반노 간 노선다툼 와중에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행보를 이어가던 그였다. 모처럼 위원장이란 무거운 모자를 쓴 신기남 의원을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번 특위에선 어떤 일을 하나.
“간단히 말하면 국정원 개혁이다. 구체적으로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불법지시 의혹을 비롯해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관련 등 선거개입 의혹 일체와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직권남용 의혹, 전·현직 국정원 직원의 대선·정치개입 관련 의혹과 비밀누설 의혹,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 의혹 등을 조사할 것이다. 국정조사특위는 공개회의를 원칙으로 하고, 과반수 의결을 기준으로 회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지극히 민감한 사안이고 과반수가 돼야 의결이 가능해 장애요소가 많겠지만 정당들이 국민의 여망을 무시할 수 없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국민들의 비난이 커지고 국민들의 신뢰도 잃어버릴 게 뻔하지 않겠는가. 여야 모두 국민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노력하면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첫 회의 인사말에서도 국회가 신뢰를 잃어버린 요즘 정쟁이 아니라 상생의 무대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국정원은 필요한 조직, 이번 기회에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위원들의 면면을 보니 민주당의 경우 정청래, 박영선 의원 등 저격수들만 모였더라.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맹렬 의원들만 포진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논쟁의 당사자들이 아니라 국정원과 관련된 진실과 진상을 밝히는 것이므로 오히려 에너지가 큰 의원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국정원이 공개한 NLL 대화록은 다 읽어봤나.
“국정원이 공개한 것이 아니라 누설한 것이다. 우리는 그 내용을 다룰 것은 아니다. 그 전에 공개된 발췌록이 왜곡되어 있었다. 전후 맥락을 끊고 발췌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전문을 읽어본 이들은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해를 풀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더라.”

그 대화록 외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 특유의 화법이 많은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는 지적이다. ‘대통령 못해먹겠다’ 등등.
“노 전 대통령의 화법은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거칠다. 그것이 인권변호사나 정치 초창기에는 대중들에게 매력으로 부각되었지만 대통령이 되어 보수진영에서 비판받다보니 약점이 되었다. 난 매력의 편에 서고 싶다. 노 전 대통령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거칠게 한 표현도 상황, 맥락, 당시 환경 등을 다 파악하면 그분의 깊은 세계관과 철학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떻게 국조위원장을 맡게 되었나.

“김한길 원내대표가 어려운 특위이고 여야를 잘 이끌어 원만한 성과를 낼 중진의원이 필요하다고 하더라. 국민의 관심과 여망이 커서 잘못하면 엄청난 비난을 받을 거다. 국회에서만 할 수 있는 역할이다. 위원장은 철저히 중간적 입장이라 언행을 조심하고 있다. 민주당 장외집회 때도 안 나갔다. 편파성 시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아서다.”

17대 때도 정보위원장을 맡지 않았나.
“당시 정보위원장으로 국정원에 관한 개혁운동을 시도했다. 주간경향이 지난호에 나와 함께 정보위에서 활동한 임종인·최재천 의원과 임종인 전 의원을 잘 인터뷰했더라. 정보위원장을 하며 그들에게 국정원 개혁을 주문했다. 당시 여당 의원들에게 국정원 개혁을 맡긴 것이 이례적이고 개혁적이었다. 우리는 당시 국정원 개혁과 예산결산소위원회에서 예산문제를 심도깊게 연구했다. 그런데 정작 청와대 측에서 국정원 개혁을 할 의사가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가 정권을 잡았으니 우리가 국정원을 악용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실제 국정원장과 독대도 안 했다. 참 그분다운 순진한 생각이다. 그때 만약 청와대를 설득해 국정원을 개혁했다면 오늘날 이런 사태가 안 벌어졌을 것 같다.”

그 당시 국정원을 연구하면서 느낀 점은.
“국정원 내부 사정도 알게 되고 애정도 가졌다. 국가에 꼭 필요한 조직이고 발전시켜야 할 조직이다. 국정원 직원 가운데 인재가 많다. 특히 해외 파견자들의 경우 정식 외교관보다 현지 상황 파악 능력도 뛰어나고 현지 외국어에도 능통해 더 맹활약하는 이들이 많았다. 아마 양성과정 자체가 현지 전문가를 키워 외교관보다 더 세분화해 장시간 교육을 시키는 덕인 것 같다. 그런 조직과 인재를 잘못 활용해 국민의 지탄을 받아서야 되나. 국정원 정치개입이 드러난 것은 불행이지만 이번 기회에 본연의 자리를 찾아 신바람나게 일하는 조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국정조사가 성과를 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금 국정원 직원들도 그걸 바랄 것이다. 엘리트들이 댓글이나 달고 있자면 얼마나 자괴감을 느끼겠나.”

2005년부터 <신진보연대>를 만들어 줄기차게 진보노선을 주창했다. 다들 ‘진보’ ‘진보’ 하는데 정확한 개념은 뭔가.
“국내·외로 개념에 차이가 있다. 국외의 진보란 평화다. 남북통일이 이뤄지고 전쟁이 안 일어나는 평화가 진보다. 국내적으로는 평등이다. 부익부 빈익빈 타파가 진보가 추구하는 바다. 서민의 삶이 나아지도록 복지시스템이 제도적으로 안착되는 것이 진보사회다. 구체적으로 정부나 사회 곳곳에서 예산 배정이 잘 되면 그것이 평등사회고 복지국가다. 10년 전엔 다들 중도실용만 강조했다. 당시 진보란 민노당 정도만 쓰는 용어였다. 정치는 이념이 우선이다. 신진보연대를 만들어 지금도 리포트를 낸다. 덕분에 그때 진보를 외친 나만 왕따당하고, 이상한 사람이 됐다. 그런데 요즘은 다들 자신이 진보라고 당당히 밝힌다. 진보나 사회민주주의의 금기가 풀어진 것 같아 반갑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마치 진보가 유행병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된다. 유행은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판을 무릅쓰고 진보를 주장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이제 사탕발림식 복지가 아니라 진정한 사회복지가 이뤄지려면 사회민주주의로 가야 한다.”

골수 진보주의자면서도 <진보의 파산>이란 책도 쓰지 않았나.
“그건 지난 대선을 분석한 책이다. 지난 대선은 우리 정치사에 큰 의미가 있다. 문재인 후보가 처음으로 진보를 표제로 내걸고 나서 진보적 공약을 했다. 그래서 보수를 표방한 새누리당과 맞서는 전선이 형성됐다. 과거엔 군사독재와 민주투사 대결, 혹은 영호남 지역대결이었는데, 선명하게 이념을 내건 최초의 대선이다. 심상정·안철수 후보의 사퇴로 민주당이 진보진영의 대표주자가 된 것은 큰 의미가 있고, 48% 득표면 굉장한 선전이다. 다음 대선도 진보를 내걸고 결집하면 최초의 진보주의 정권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도 지지 않았나.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이길 수밖에 없는 선거를 졌다고도 한다.
“그건 사돈이 남말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남말 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잘못해서 졌지만 자숙은 해도 자해는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 진보진영의 한계를 알고 반성하면 된다. 새누리당과 비교할 때 민주당 당세가 얼마나 열악한가. 돈, 지역기반, 그 견고한 보수언론 등 모든 면이 새누리당보다 약하다. 또 지지율로만 보면 안 된다. 지지만 하면 뭐하나, 투표율은 새누리당이 10% 이상 높다. 그나마 민주당 후보가 경쟁력이 우월한 덕분에 48%나 득표한 것이다.”

그럼 다시 민주당의 개혁을 할 때인가. 천·신·정 같은 탈레반족이 나와야 하는가.
“이제 개혁의 시대는 지났다. 당시엔 개혁이 화두였다. 정계에 구시대적 폐단이 너무 많았고, 정치부패도 심했다. 파벌정치, 보스정치 시대라 보스 눈에 안 들면 공천받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동교동계에 저항하며 개혁을 외쳤다. 정말 당에서 쫓겨날 뻔했다. 심야에 천·신·정 3인이 모여 ‘정치 그만둘 각오하자. DY(정동영)는 방송계로 복귀하고, 우리는 법조계로 돌아가자. 그전에 악! 소리 한 번 질러보자’고 격정 토로를 했다. 다행히 국민들 사이에 개혁에 대한 열망이 컸고, 언론이 지지해줘서 안 쫓겨나고 주도권을 쥔 것이다. 정치자금법 등이 그때 만들어졌다. 지금은 국회선진화법도 만들어지는 등 개혁이 많이 됐다. 요즘의 화두는 민생과 복지다. 과격한 개혁파보다 튼실한 실무형의 정치인이 필요하다.”

다들 국회의원의 권한, 특권을 내려놓으라고 하는데 신 의원은 유독 우리나라 국회 권한이 약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처럼 국회 권한이 약한 나라도 없다. 예산편성권은 정부 부처에 있고, 국회는 예산동의권만 있다. 또 법률안 제출권의 경우 정부입법과 의원입법이 있는데, 거의 대다수가 정부입법이다. 여당은 예산안, 정부입법안 등을 빨리 처리하려고 하고, 정부가 입법한 것을 국회가 의결하지 않으면 언론은‘산적한 민생법안’ 등의 제목으로 비판한다. 외국의 경우 중요 법안은 몇 년씩 간다. 우리 국회에 감사권도 없다. 그러니 국회의원은 거수기 노릇만 한다. 이처럼 권한이 약한데도 불체포특권, 의원 세비나 연금 등을 기득권이라며 포기하라고 한다. 월급도 봉급이 아닌 ‘세비’라고 한다. 열심히 일하도록 힘을 줘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동갑이고 아버지들이 대구사범 동창이라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 많은 기대를 한다. 무난하게 가고 있다고 판단했는데 인사문제가 터졌을 때 좀 걱정스럽다가 국정원 댓글 사건을 보고 이건 아닌데 싶더라. 측근들도 지금쯤 상황판단을 잘못했다고 깨닫지 않았을까. 박정희 전 대통령과 선친은 대구사범 동창이라 육영수 여사와 결혼할 때 청첩장에 우인 대표로 이름이 적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분은 만주군으로 입대했고, 아버지는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해방 후 경찰로 갔다. 6·25 참전으로 태극무공훈장까지 받는 등 무인의 길을 걸었다. 퇴직 후 고생을 많이 해서 나도 대학시절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3곳이나 하며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를 했다. 내집 마련을 한 게 재선의원 시절, 그것도 집값이 비교적 싼 화곡동에서였다. 박 전 대통령과 아버지는 쿠데타 이후로 소식이 끊겼고, 나와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 만난 적도 없다.”

이제 60대이고 4선이다. 정치란 무엇인지 알 경륜과 나이가 아닌가.
“18대에 쉬었으니 5선급 4선 의원이다. 이제야 정치에 눈이 열리고 감이 잡힌다. 원래 대학 때도 문예반에 태권도도 하고 술도 좋아하는 낭만파였다. 소설가를 꿈꿨지만 밥벌이를 하려고 법대에 진학했다. 변호사 시절, 김대중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정치는 사회를 만드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법을 만들고, 예산을 배분하고, 정부를 감독·감시하면서 국민 행복에 기여한다. 변호사는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직업이지만 국회의원들이 만든 법으로 움직일 뿐이다. 한 나라의 정치는 국민의 의식 수준에 달려 있다. 국민이 눈을 크게 부릅떠서 정부와 정치인을 자극해야 한다. 새무얼 헌팅턴이 ‘정치를 멸시하는 국민은 정치로부터 보복당한다’고 했다. 우리 국민들의 민생과 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정치에 투신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국회의 말석이라도 차지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이번에 국조위원장을 맡았으니 신명나게 일하겠다. 기대해 달라.”

유인경이 만난 사람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이런저런 일을 해서) 참 기뻤다”란 표현이 자주 나와 신기했다. 신기남 의원도 비슷한 것 같다. 2006년 세계도서관협회 조직위원장을 맡았을 때도 ‘의미있고 중요한 일을 맡은 것이 출세라면 최고의 출세를 한 것이라 기쁘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이번 인터뷰에서는 정치인이 된 것도 행운이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유지만,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은 행복이라고 하지 않나. 항상 ‘행복한 사람’ 신기남 위원장은 아마 이번 국조위원장 일도 즐겁게 할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크다. 아무리 열심히 하는 사람도 좋아서 하는 사람은 이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