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경제]통증 - 샌드위치 신세,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

아무리 피를 많이 흘려도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 조금만 피를 흘려도 치명적인 여자가 있다. 한쪽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무통증’. 또 한쪽은 한 번 피를 흘리면 잘 멎지 않는 ‘혈우병’을 앓고 있다. 탐욕스러운 서울 하늘 아래서 기댈 사람은 두 사람 서로밖에 없다.

곽경택 감독의 <통증>(2011)은 아픔을 간직한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다. 남순(권상우 분)은 어릴 적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뒤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동현(정려원 분)은 혈우병으로 부모님을 잃었다. 대부업체로부터 빌린 돈이 있다. 원금이 350만원인데 이자가 붙어 900만원이 됐다. 그 돈을 받으러 오는 자가 남순이다. 남순은 자해공갈로 돈을 받아내는 채권추심업자다. 동현은 액세서리를 팔아 하루하루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똑순이다. 남순이 동현의 보증금을 빼내가자 동현은 길거리로 내몰린다. 남은 돈을 받으러 끝까지 쫓아가는 남순. 그러면서 둘은 서로를 점차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게 된다. 남순은 말한다. “예전에 너무 답답해 울고 싶었는데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더라. 그때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나에게 물어봐줬더라면 좋겠더라. 너는 앞으로 내게 말해. 울고 싶거나 웃고 싶을 때.” 동현이 답한다. “앞으로 울고 싶은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해. 내가 대신 울어줄게”

<통증>은 만화가 강풀이 원안을 갖고 있다. 만화로 나오기 전에 영화가 먼저 됐다. 멜로영화지만 소재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중산층 가정이 병이 나니 단숨에 하층민으로 추락한다. 살기 위해 대부업자에게 급전을 빌렸는데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추심업자가 따라와 협박한다. 재개발지역은 전쟁터다. 생존권을 강조하며 재개발지역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철거민들이 있다.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용역이 투입된다. 서울은 영화 속 대사처럼 ‘촌에서 올라와 대가리 디밀고 한 번 붙어보겠다는 놈들로 꽉찬 곳’이다.

동현을 사랑하게 된 남순. 남순은 맞고 돈버는 일을 그만두려 한다. 동현과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동현도 혈우병을 이겨내고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서울은 약자를 위한 도시가 아니다. 동현의 혈우병 약을 구하기 위해서는 큰돈이 필요하다.

남순은 다시 철거현장에 내몰린다. 철거현장은 재개발을 하려는 자본주와 살기 위해 투쟁하는 철거민이 뒤엉킨 곳이다. 그들 사이에 남순이 투입된다. 두 힘에 낀 남순의 모습은 흡사 넛크래커(nutcracker)를 닮았다. 넛크래커란 호두를 양쪽에서 눌러 깨는 기계를 말한다.

경제분야에서 넛크래커란 미국·일본 등 선진국에는 기술과 품질경쟁에서 밀리고, 중국·동남아 등 개도국에는 가격경쟁에서 밀리는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외환위기 직전 우리나라 수출산업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컨설팅 회사인 부즈·앨런&해밀튼사가 한국보고서에서 사용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은 비용의 중국과 효율의 일본 사이에서 협공을 받아 마치 넛크래커 속에 끼인 호두처럼 됐다. 변하지 않으면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라고 밝혔다.

2000년 이후 우리나라는 IT를 비롯, 휴대폰, 자동차, 조선, 반도체 등이 힘을 내면서 위기를 헤쳐나왔다. 하기에 따라서는 일본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높고, 중국에 비해서는 품질경쟁력이 있다며 ‘역 넛크래커’론도 제기됐다.

영화 속 경제

재개발 철거현장에 투입된 남순에게 주어진 임무는 ‘등신불’이다. 철거민들의 폭력을 유도해 이를 맞고 추락해 죽으라는 것이다. 철거민들의 폭력성이 부각되면 여론의 힘으로 철거를 강행하겠다는 것이 자본주의 전략이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남순과 동현은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셈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