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경제]연애의 온도 - 가치판단 달라지는 ‘기준점 효과’

“우리 왜 싸웠지? 싸운 건 기억이 나는데 뭐 때문에 싸웠는지는 기억이 안 나.”

연애란 그렇다. 죽일 듯 말 듯 싸우는데, 싸우고 나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이 나질 않고, 애써 기억을 되살려보면 의외로 유치했던 이유에 또 어이가 없어진다. 진짜 심각할 때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냥 침묵이다. 싸운다는 것은 아직 애정이 있다는 얘기다.

노덕 감독의 <연애의 온도>는 요즘 연애를 민낯으로 드러내는 영화다. 동화 속 판타지는 쏙 뺐다. 직장이야기가 좀 코믹스럽긴 해도 연애의 감정만큼은 더붙이거나 더 뺄 것도 없어보인다. ‘19금’짜리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170만명 이상이 봤다는 것은 그만큼 공감했다는 얘기일 테다.

이동희(이민기 분)와 장영(김민희 분)은 3년째 사내 비밀연애를 하고 있다. 이들은 은행원이다. 둘은 ‘쿨’하게 헤어지기로 한다. 멀어지면 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 사랑이 그런가. 미련이 남고 아쉬움이 남아 서로를 미치게 만든다. 페이스북 비밀번호를 알아내 들어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가 싶어 소문에 귀를 쫑긋 세운다. 이제는 남의 사람이라고 선언했는데, 마음 한켠은 여전히 나의 사람이다. 연애란 그렇다.

그래서 영은 말한다. “많은 연인들 중 82%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대.”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그중 계속 만나게 될 확률은 3%래. 나머지 97%는 다시 헤어진대. 같은 이유로.” 미련이 남아 다시 만나보지만 두 사람을 헤어지게 했던 이별의 원인은 그대로다. 미련마저 소진될 때 연인은 다시 헤어진다. 두 번째 헤어질 때는 울지도 않는다. 그냥 말이 없을 뿐이다.

한 번 헤어졌다 다시 만난 연인이 다시 잘 될 확률은 고작 3%.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다. 그때 동희가 말한다. “로또 1등 당첨될 확률이 814만분의 1이래. 그래도 매주 몇 명씩 당첨되잖아. 그러니깐 그 3%는 정말 큰 거야.”

814만분의 1은 벼락맞을 확률보다 낮다. 프랑스 경제학자인 알베르 자카르도는 “로또는 있지도 않은 희망에 매기는 또 다른 세금”이라고 말했다. 이 확률에 비교하니 3%는 무지무지하게 높아보인다. 기준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가치판단이 달라지는 현상을 행동경제학에서는 기준점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부른다. 영문 그대로 ‘앵커링 효과’로 부르기도 한다. 정박한 배는 닻을 내린 지점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트버스키와 카너먼은 UN 가맹국 중 아프리카 나라들이 차지하는 비율을 묻는 실험을 했다. 한 실험자들에게는 10을 보여줬다. 또 다른 실험자는 65를 보여줬다. 10을 본 참가자들은 UN가맹국 중 아프리카국이 평균 25개국이라 답했다. 65를 쥔 참가자들은 45개국이라고 답했다. 최초에 어떤 숫자를 봤느냐에 따라 이들의 추정치가 달라졌다.

기준점 효과는 특히 마케팅에서 자주 쓰인다. 희망소비자 가격을 1500원 해놓고 700원에 팔면, 희망소비자 가격을 1000원 해놨던 것보다 더 싸게 느껴진다. 기준점 효과는 법정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검사의 구형이 높으면 판사의 선고 형량도 높고, 구형이 낮으면 선고형량이 낮은 경향이 있다.
814만분의 1은 0.00005%다. 로또 확률을 접한 영은 “아 가능성이 있는 확률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릇 세상일이 그렇다.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내 삶은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도,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상대비교 때는 더 그렇다.

영화 속 경제

노덕 감독은 말한다. “사랑이라는 게 가끔은 누구의 잘못도 없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별)으로 치닫을 때가 있다”고. 어쩔 수 없는 이별이 닥쳤을 때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아픔의 정도도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틀림없이.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