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민간인 사찰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예전에 비디오 테이프로 영화를 볼 때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불법 복제의 위험성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문구는 사실 매력적인 경고가 되지 못했습니다. 호환 마마는 이미 무서운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호환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이고, 마마는 천연두에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호랑이는 우리 땅에서 사라진 지 오래됐고, 천연두 역시 1977년에 퇴치됐다고 알려졌습니다. 용어조차 낯설 지경이었으니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1980년대에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전짓불 공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청준 소설가의 <소문의 벽>에 등장하는 공포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 박준은 소설가입니다. 그런데 전짓불 공포로 정신치료를 받습니다.

전짓불 공포란 6·25전쟁 당시 경찰과 공비가 번갈아가며 마을을 점령하던 시절 주인공이 겪은 것입니다. 마을 사람이 잠들어 있는 깜깜한 밤중에 누군가 방문을 열고 전짓불을 비추며 ‘당신은 누구 편이야’라고 묻습니다. 밝은 전짓불 때문에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절망에 빠집니다.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목숨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호환 마마가 전혀 공포스럽지 않았던 것처럼, 전짓불 공포 역시 공포스럽지 않았습니다. 6·25전쟁을 겪지 않은 전후세대에게는 그 공포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문학작품 속의 아득한 공포처럼 여겨졌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의 공포는 군사독재 정권이었습니다. 대학생이나 학부모들은 본인이나 자식이 혹시 무슨 잘못을 저질러 감옥에 갇히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르면서 이 공포도 점차 사라졌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사찰은 호환 마마와 같이 역사책에 있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민간인 사찰에 관한 자료가 밝혀지면서 이 공포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아직까지 민간인 사찰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실감하는 공포는 현실적입니다.

민간인 사찰의 피해자인 김종익씨는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일부 연예인들은 실제로 사찰을 당한 경험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이들에게 왜 공포를 느끼느냐고 묻는 것은 우문입니다. 왜 하필 선거를 앞두고 사찰을 이야기하냐고 묻는 것은 더욱 더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왜 공포를 느끼느냐고 묻는 것이 더욱 공포스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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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보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민간인 사찰을 덮으려 하고, 전 정권에도 있었다고 물타기하려 하고, 민간인 사찰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려 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민간인 사찰 같은 별것도 아닌 것을 갖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력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공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윤호우 편집장 ho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