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해외방랑기 ‘일본 삿포로’
비행기는 일본 삿포로 신치토세 공항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삿포로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고 기장은 방송했다. 눈 내리는 삿포로까지 온 것은 일본 외무성 기자 교류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도쿄 환경청 공무원들을 만나고, 한국에서도 안 가본 정수장엘 가고, 쓰레기 소각장에도 갔다. 기억할 수 없이 많은 박물관과 전시관을 보고, 기후변화 시대에 새롭게 떠오르는 첨단과학 기술의 총아, 연료전지로 가는 차도 타봤다. 보통 차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걸 왜 탔단 말이냐. 일정의 마지막은 홋카이도였다. 그해 여름 거기서 열릴 G8 회담이 얼마나 잘 준비되고 있는지, 외무성은 몹시도 알려주고 싶어했다.
눈이 가득 내린 일본 삿포로 거리.
나는 내심 홋카이도의 쿠시로 습지를 가보고 싶었다. 1980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습지였다. 5012㏊에 수백 마리의 두루미와 수백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대단한 습지라고 했다.
G8은 공항에서도 두 시간은 달려가야 하는 온천 휴양지 토야코에서 열린다. 세계 정상들이 안전을 염려해 시골마을로 들어가는 것인지, 기왕지사 일본까지 오는 김에 온천 한 번 찍고 가보자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그랬다. 공항을 빠져나오는 길에는 저녁이 내려앉고 있었다. 내 무릎만큼씩 눈이 쌓인 뒤로 하얀 자작나무가 숲을 이뤘다. 혹시 여기가 북극곰(여행 동행자)과 내가 오래도록 집을 짓고 살 곳일까. 우리가 문 밖의 눈을 쓸고, 털모자의 눈을 털고 들어와 호호 불며 뜨거운 코코아를 마실 곳일까. 호텔 로비의 뒷문에도 아이 키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영어와 일본어로 ‘열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다. 작정하고 열려고 해도 눈 무게 때문에 문이 밀리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호텔 기념품 가게에서 선물용 과자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절대 그런 기온이 나오지 않겠지만 ‘빙점 이하 41도’라는 과자가 보였다. 홋카이도 명물 ‘눈의 연인’ 과자의 짝퉁 버전인 듯 싶었다. 얇은 과자 사이에 화이트 초콜릿이 발라진, 우리로 치면 ‘쿠크다스’ 비슷한 과자다. 똑같이 생겨놓고 이름만 다른 ‘북풍의 여행자’도 있었다. 흑임자가 들어간 계란 모양의 케이크도 팔았다. 계란을 깨면 하얀 새끼 물범들이 튀어나오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럴 리가 없다. 물범은 포유류다. 알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홋카이도 동북부로 올라가면 물범을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겨울에는 유빙 조각 위로 새끼 물범이 귀엽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유빙 투어도 있다.
낡고 쇠락한 느낌의 도시, 삿포로
다음날에도 종일 여기저기 끌려다녔다. 세계 정상들이 묵으실 예정인 윈저 호텔은 고전적 추리소설에 나올 법한 훌륭한 호텔이었다. 즉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손님들은 우아한 샹들리에 아래서 시가를 피우고, 소년탐정 김전일이 나타나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수수께끼는 풀렸어”라고 할 때까지 눈이 그치지 않고 내릴, 그런 호텔이었다.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루스츠 리조트도 갔다. 스키를 타러 간 게 아니다. 다 지어진 것도 아니고, 프레스센터가 만들어지는 중이라고 해서 갔다. 왜 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틈틈이 토야코 면장도 만나고, 홋카이도 공무원도 만났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이동하느라 차에서 보냈다. 창 밖의 자작나무 숲 위로는 쉬지도 않고 눈이 내렸다.
이따금 하얗게 눈에 덮인 조그만 마을들이 나타났다. 그림책 작가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처럼 핑크색 코끼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슬렁거리고 있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풍경들이었다. 세 시간에 한 번씩 “쿠시로!”를 주장하던 내게 가이드는 저녁 무렵 슬며시 미안한 얼굴로 다가왔다. “다녀오는 길에만 꼬박 하루가 걸린대요. 지금은 겨울이어서 가봐야 볼 것도 없다고. 눈도 너무 많이 오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삿포로로 돌아오니 함박눈은 눈보라로 변해 있었다. 우리는 북극 원정대와 같은 비장한 심정으로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가 삿포로 명물이라는 도케이다이 시계탑을 보고, 역시 삿포로 명물이라는 미소 라멘을 줄서서 먹었다. 시계탑은 속았다 싶었지만, 미소 라멘은 눈보라 뚫은 보람이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보랏빛 전구가 반짝이는 삿포로 테레비 타워를 배경으로 차례로 인증샷을 찍었다. 파리 에펠탑을 따라 만든 도쿄 타워를 또 따라 만든 첨탑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에펠탑과 아무 닮은 점 없는 독특한 하나의 첨탑 장르를 구축하고 있었다. 빨간 줄이 그려진 낡은 버스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눈에 덮인 도로를 질주는 못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달려갔다. 삿포로는 낡고 쇠락해 보이는 도시였다. 소비에트풍의 무미건조한 건물에는 정체불명의 건강 목걸이나 가짜 명품 시계를 파는 별 볼일 없는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다. 문을 연 서점에 들어가 홋카이도 원주민 아이누에 관한 책을 한 권 샀다. 표지에 원주민 청소년같이 생긴 아이가 활을 들고 있는 만화가 그려져 있다. 내가 그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아이누’ 세 자이기 때문에, 홋카이도 원주민이 어떻게 일본에 점령되고 사라졌는지를 이해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다.
1050엔짜리 밍크고래 통조림이라니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멀고 먼 조상의 핏줄을 따라 에스키모 마클락 같은 어그 부츠를 신은 여성들이 어기적거리며 육교를 내려왔다. 공항 가기 전에 오타루에 들러 오르골을 사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물 건너가고,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해 수산시장에 가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캄차카에서 잡아온 대게들이며, 말린 생선들이며, 기념품용으로 진공 포장해놓은 감자도 있었다. 감자? 홋카이도 명물은 초콜릿뿐 아니라 감자와 멜론도 있었다. 초콜릿을 바른 감자칩, 멜론맛 초콜릿 같은 ‘통섭’이 돋보이는 과자들도 보였다. 압권은 쿠지라 카-레, 고래고기 카레 통조림이었다. 그것도 밍크고래 카레다.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밍크고래가, 전 세계의 보호를 받는 고래가 겨우 1050 엔의 통조림이 돼 먼지 쌓인 생선가게 선반에 얹혀 있는 것이다. 고래고기 통조림 옆은 바다사자 카레 통조림이었다. 늑대의 자세로 고개를 들고 울고 있는 바다사자가 그려져 있다. 나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창 밖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눈을 치우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눈은 자전거 위에도, 게 모양의 간판 위에도, 창틀에도, 길가에도 공평하고 끈기 있게 계속 내렸다. 저렇게 눈이 내리는 나라들을 북극곰과 나는 계속 여행하게 될까. 우리는 북극권의 적지 않은 나라들을 때로는 시계 방향으로, 때로는 되는 대로, 대체로는 휴가와 비행기의 일정에 맞춰 여행했다. 여행을 할수록 갈 곳은 계속 늘어났다. 우리는 언젠가 바이칼아무르철도를 타고 시베리아의 평원을 건널 것이다. ‘뱀(BAM)’이라고 줄여 부르는 바이칼아무르철도는 바이칼호 북쪽으로 달리는 산업철도다. 그리고 우리는 그린란드의 디스코 베이에서 빙산의 숲을 보고, 스밀라가 살던 누크까지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캐나다 원주민 말로 ‘우리의 땅’이라는 누나버트 주의 이콸루이트에 가서 이누이트 어린이들과 실뜨기 경기를 벌이고,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한 쪽은 러시아, 한 쪽은 미국 땅인 베링해의 리틀 다이오미드 섬과 빅 다이오미드 섬을 찍고, 캄차카 반도의 불곰들을 만나 알래스카 그리즐리 곰의 안부를 전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오늘 삿포로 공항에서 북극곰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이 가득 쌓인 공항 계류장에는 비행기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서 있었다. 삿포로를 출발하는 모든 비행기는 일단정지였다. 그해 겨울 삿포로에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이었다.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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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국민이 바뀌란 소리냐?
대통령 말씀에 또 답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