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애의 북위66.5도](27)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한다

좌충우돌 해외방랑기 ‘알래스카 싯카’

케라스 비앤비의 버사 케라스는 버스 정류장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하얗게 센 단발 파마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낀, 몸집도 마음도 넉넉해 보이는 할머니였다. 로빈 윌리엄스가 가정부 할머니로 둔갑하고 나왔던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좀 닮았다. 실제로도 인정스러운 할머니였다.

일본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를 기려 세운 토템폴.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지만, 일요일 새벽 4시에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을 데리러 자동차를 몰고 나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고마워할 것 없어. 우리집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오거든. 거기서 여기까지 비행기로 10시간도 넘게 걸린다며? 얼마나 피곤하겠어.”

우리는 페리를 타고 왔는데. 굳이 발설할 필요는 없는 사실 되겠다. 그런데 왜 이 집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오는 걸까. 할머니는 백밀러로 우리를 흘낏 보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모든 건 한 일본인 사진작가 때문이야. 호시노 미치오라고 혹시 들어본 적 있어?”

일본인 친구를 잊지 못한 인디언 할머니
또 호시노 미치오였다. 이 길지도 않은 여행기의 알래스카편에만 벌써 세 번째 등장하고 계시다. 알래스카에 몸과 마음을 묻은 일본인 사진작가. 1996년 러시아 캄차카에서 불곰을 촬영하다 습격당해 세상을 떠났다. 진정한 야생사진 작가답게 그는 알래스카 곳곳에도 야생동물이 영역을 표시하듯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그 중에서도 싯카에는 그의 흔적이 무더기로 남아있었다. 버사 할머니와 페테 할아버지 이야기는 그의 에세이 ‘낚시와 함께 한 20년’에도 나온다. 호텔 방이 동나 버사 할머니의 비앤비(민박집)로 처음 찾아왔던 호시노 미치오는 그 후 15년 동안 싯카를 찾을 때마다 이 집에서 묵었다. 2층의 우리 방이 호시노 미치오의 단골 방이었다. 침대 위에 곰 사진이 걸려 있고, 이불에도 곰이 그려져 있었다. 북극곰(여행 동행자)은 호시노 미치오 귀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며 즐거워했다.

할리부트 해변공원에는 호시노 미치오 토템폴도 세워져 있었다. 그가 죽은 뒤 일본과 알래스카에 ‘호시노 미치오 재단’이 세워졌는데, 그 재단에서 2008년 100만 달러를 내 세운 토템폴이었다. “몹시도 상냥했던 사람”이었던 그를 기려 인디언 친구가 토템폴을 만들고, 알래스카 여기저기에 흩어져 사는 원주민 친구 수십 명과 일본인 수백 명이 제막식에 참여했다. 토템폴 맨 아래에는 렌즈를 든 호시노 미치오의 얼굴이, 그 위엔 고래, 곰, 그리고 틀링깃 인디언의 신이기도 한 까마귀가 차례로 새겨져 있었다. 토템폴을 올려다보기 위해 내 팔을 잡으면서 버사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할머니의 좋은 친구였다. 몇 달에 한 번씩 찾아와 함께 연어 낚시를 가고, 부엌에서 요리를 해 먹던 일본인 친구. 어느 날 미국 본토에 사는 아들이 전화를 걸어와 “혹시 우리 집에 오는 일본 사진작가 이름이 호시노 미치오예요? 오 나의 하나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기고하는 엄청 유명한 작가래요!”라고 말하고 나서야 그가 꽤 유명한 작가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수십 수백명의 일본인이 꾸준히 싯카를 찾아오는 걸 보고는 더욱 확실히 알게 됐다.

버사 할머니는 지금도 집 앞에서 어정거리는 일본인이 있으면 “혹시 미치오가 머물던 곳이 보고 싶어요?”라며 집으로 데려온다고 했다. 5년 전에는 호시오 미치오 재단 초청으로 일본 홋카이도에도 다녀왔다. 버사 할머니는 틀링깃 인디언인데, 생전에 호시오 미치오가 자기네 나라 북쪽 섬의 아이누 인디언과 틀링깃 인디언이 너무나 비슷하다고, 꼭 한 번 가보자고 했다고 한다.

싯카 국립역사박물관 야외 마당에는 인디언들이 승처럼 깎아서 만든 토템폴 10여기가 세워져 있다.

호시노 미치오는 아니지만 내 눈에도 아이누와 틀링깃은 닮아 보였다. 다음날 우리는 커뮤니티 센터에 가서 틀링깃 전통 춤을 봤다. 싯카도 케치칸 못지않은 크루즈 식민 도시여서 크루즈 배가 들어오는 오후 1시, 커뮤니티 센터에서 ‘인디언 댄싱 쇼’를 보여준다. 틀링깃 주요 클랜(씨족)들의 춤과 음악을 재현한 30분짜리 쇼다. 댄서들은 ‘어이’ ‘에이’ 류의 구조를 가진 단순한 가락을 절도 있게 반복했다. 무엇보다도 까마귀, 곰, 사람의 모습을 새겨넣은 망토와 의상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가문의 상징을 단순화시킨 저 디자인이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동네 일식집 문 앞에 걸려 있는 두 폭짜리 커튼이었다. ‘환태평양 불의 고리’를 따라 알류산 열도를 징검다리로 아이누와 틀링깃은 연결돼 있는 것 아닐까. 그들 문명의 흔적이 그래서 우리 동네 일식집까지도 강림하신 것이다.

라거펠트며 베라 왕이 싯카까지 안 오셔서 그렇지, 알았더라면 틀링깃 망토와 모자가 올 가을 뉴욕 런웨이를 점령했을 것이다. 고래, 곰, 사람, 비버, 독수리, 까마귀 같은 자연의 형상들은 웬만한 현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울고 갈 정도로 디자인화돼 있었다. 그저 블루베리를 담고 으깨는 용도일 뿐인데, 삼나무로 깎은 국자의 우아한 곡선과 토템폴을 닮은 섬세한 손잡이들은 놀라웠다.

연어의 일생이 억울하게 느껴진 순간
‘인디언’ 글자가 붙은 건 다 갖다 모아 놓은 ‘섈든 잭슨 박물관’에서 나는 다리가 아프도록 쪼그리고 앉아 집기들을 구경했다. 다 집어다 집에 갖다 놓고 싶었다. 나란히 전시된 에스키모 생활용품은 한층 더 원시적으로 보였다. 큐레이터가 ‘에스키모 안티’여서 일부러 갖다 놓았음이 분명하다. 이쯤 되면 쇠붙이를 제련하거나 누덕누덕 천을 기워 만든 서구의 문명이 우스웠을 것이다.

다음날에는 인디언 리버로 트래킹을 갔다. 한때 싯카를 먹여 살렸던 통조림 공장은 사라졌지만, 연어는 여전히 싯카로 돌아온다. 인디언 리버를 따라 수백 수천 마리의 연어가 강물을 거스르고 있었다. 등과 지느러미는 비늘이 떨어져 나가 이미 하얗게 변했다. 물살이 고였다 한 번에 풀어지는 급류에는 고향을 눈앞에 두고 죽어버린 연어들이 쌓여 있었다. 맴돌기만 할 뿐 좀처럼 급류를 뛰어오르지 못하는 연어들을 향해 우리는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쳐 줬다. 힘을 내!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 여기까지 왔잖아! 내가 응원을 하건 말건 연어들은 꾸역꾸역 바위에 온몸을 갈아가며 강물을 거슬러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짝을 찾아 알을 낳고, 죽을 것이다.

짧게는 100년, 길게는 500년 연어의 귀향을 지켜봤을 인디언 리버 변의 스프러스 숲길을 걸으면서 나는 어쩐지 억울한 심정이었다. 아니, 이렇게 노력했으면 뭔가 보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연어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날 저녁 식당에서는 연어 스테이크가 나왔다. 포크를 들다 말고 멈칫했다. 저렇게 피똥을 싸가며 살아가는 연어를, 급류가 나오면 일단 돌아가려는 나 같은 인간은 먹을 자격이 없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최명애의 북위66.5도

내가 억울해 하건 말건 자연은 자신의 섭리대로 움직인다. 자연은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북극 자연의 일부 같던 호시노 미치오는 캄차카 불곰에게 습격당해 세상을 떠났다. 알래스카 그리즐리 곰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매년 남동 알래스카의 그리즐리를 찾아갔던 티모시 트레드웰은 결국 그 곰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알래스카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티모시 트레드웰의 슬프고도 난감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리즐리 맨>을 봤다. 발 아래에도 영화처럼, 알래스카의 광활하고 무심한 평원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