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황푸장 강변에서 생각하는 식민지 시대

‘잔재’ 극복해야 진정한 현대성 성취

지난 8월20일 밤, 김호기 교수는 상하이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동방명주를 바라보며 정태춘의 노래 ‘동방명주’를 떠올렸다. 상하이 푸단 대학에서 박태균 교수, 푸단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들, 「Weekly경향」 취재진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혼자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동방명주는 조선족 동포들이 인천과 단둥 사이를 오갈 때 이용하는 여객선 이름이기도 한데, 김 교수는 이 노래를 떠올리며 식민시대 조선인의 아픔을 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김 교수는 이번 글에서 조선총독부가 강력한 감시국가체제를 통해 조선을 지배했다는 점을 밝히면서 여전히 이 땅에 남아있는 식민지의 잔재를 걷어내야만 진정한 현대성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편집자 주>

상하이 와이탄 지구의 야경. 황푸장 강바람을 맞으며 푸둥의 야경을 보기 위해 수많은 상하이 시민들이 강변에 몰려 있다.

한일병합에서 전태일 열사 분신에 이르는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는 이 기획을 연재하면서 새삼 떠오른 생각 중 하나는 지난 100년 가운데 절반의 역사를 내가 살아왔다는 점이다. 60년대와 70년대까지 10대를 보냈고, 80년대와 90년대에 20~30대를 보냈으며, 지난 10년 동안 40대를 보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과거 기억이 희미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희미해지는 추억 중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더욱 또렷해지는 기억도 존재한다.

필자가 서울 도심에 진출한 것은 1978년 재수생 시절이었다. 오전에는 학원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친구들과 도심을 돌아다니며 서울이라는 도시를 본격적으로 익혔다. 우리의 거점은 종로 1가에 있던 ‘무아’ 다방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팝송을 주로 틀어주던 일종의 음악다방이었는데, 무던히도 그 다방을 출입했다. 1978년 유신체제의 우울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친구들과 밥 딜런에서 킹 크림슨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르의 노래들을 듣곤 했다.

정태춘에 대한 추억
바로 그 시절에 알게 된 가수가 정태춘이다. ‘시인의 마을’이라는 더 없이 서정적인 곡을 불렀던 정태춘의 노래들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즐겨 듣고 있다. 독일 유학 시절 정태춘의 노래들은 몇 안되는 친구 가운데 하나였다. 필자 역시 시골 출신이라서 그런지 정태춘 노래들에 담겨 있는 농촌에 대한 서정적인 노랫말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울창한 침엽수들로 끝없이 이어진 북독일 산책로에서 그의 노래들을 반복해 듣던 기억이 여전히 또렷이 남아있다.

한일병합 100년을 돌아보는데 뜬금없이 정태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그가 부른 노래 중 한 곡으로 글을 시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1985년에 발표한 ‘장서방네 노을’이다.

“당신의 고단한 삶에 바람조차 설운 날
먼 산에는 단풍 지고 바닷물도 차더이다
서편 가득 타오르는 노을 빛에 겨운
님의 가슴 내가 안고 육자배기나 할까요”

‘장서방네 노을’이라는 이 노래의 제목과 가사에는 사라지는 농촌공동체에 대한 정태춘의 애잔한 심사가 담겨 있다. 경기도 평택 출신인 정태춘 자신의 삶이 반영돼 있는 이 노래를 들으면 바다가 인접해 있는 한적한 농촌 마을을 떠올리게 된다. 서편 하늘의 노을과 장서방 얼굴에 비친 노을이 겹치면서 “기다리는 님에게로 돌아올 줄 모르”는 산업화시대 농촌사회의 그늘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한일병합 100년을 맞이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식민지시대를 포함한 지난 20세기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성찰이다. 한 마디로 지난 20세기 우리 사회는 현대성의 시대였다. 그 기원을 어디까지 소급하든, 1876년 개항부터 시작된 ‘개항시대’는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식민지시대’를 거쳐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로 이어져 왔다.

지난 우리 20세기를 돌아보는 데 여전히 유효한 시각 가운데 하나는 90년대 중반 안승준이 제시한 해석이다. 안승준은 자신의 저작 <국가에서 공동체로>(환경운동연합출판국)에서 우리 사회 근대화의 명암을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업화는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국가가 강력한 통제를 행사함으로써 달성된 것이다. 이 공업화는 한편에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져 왔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 시장에의 의존, 경제적 집중과 소득 불평등 강화, 농민계층의 희생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안승준은 근대화의 그늘로 ‘생태적 위기’를 주목한다. 생태적 위기란 물질적 환경의 파괴를 넘어서서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직과 가치가 파괴되는 것을 뜻한다. 그에게 한국의 근대화란 곧 국가에의 예속과 자율적 공동체 붕괴의 역사이자, 격렬한 문화적 변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정치·사회적 시각에서 본 식민지 시대
이러한 근대화, 다시 말해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기원의 하나로 안승준은 식민지시대의 근대국가 형성을 부각시킨다. 식민지 근대국가의 형성은 자치적인 마을공동체를 무력화시키고 또 파괴했으며, 이러한 과정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공업화와 함께 더욱 가속화됐다. 예를 들어, 근대 대의민주주의 아래서의 정책 결정은 다름 아닌 국민을 그들의 지역공동체 내의 의사결정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김호기 교수가 와이탄 지구 강변에 서 있다. 뒤에 보이는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 동방명주다.

필자가 주목하려는 것은 우리 현대성 내에서 식민지시대가 갖는 다각적 함의다. 식민지시대가 시작하면서 우리의 자주적 현대성은 좌절됐다. 그리고 이른바 ‘식민지 현대성’이 강제적으로 이식됐다. 이 식민지 현대성이 지난 20세기 우리 사회 전체에 미친 영향은 심원하다. 경제적 측면에서 식민지시대가 갖는 함의는 이 기획에서 다시 한 번 검토하겠지만, 국가와 시민사회 차원에서도 식민지 경험은 우리 현대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와 연관해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식민지 국가의 특징이다. 안승준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국가의 역할에 주목했지만, 필자는 이와 관련된 국가의 억압성을 지적하고 싶다. 식민지시대의 핵심적 국가기구는 헌병에 기반한 경찰제도였다. 1919년 3·1운동 결과 문화정치가 표방됐지만, 경찰제도에 기반한 탄압과 수탈은 오히려 강화됐고 한민족 말살정책은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추진됐다.

한 자료에 따르면, 경찰관서의 경우 1918년 751개소였지만 1920년에는 2716개소로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중 경찰 인원도 5400명에서 1만8400명으로, 그리고 경찰 비용도 800만원에서 2400만원으로 3배 정도 늘어났다. 억압적 국가기구에 기반한 이러한 식민통치는 1930년대 들어와 일본의 대륙 침략전쟁에 따른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더욱 중앙집권화됐으며, 그 운용방식 또한 더욱 군사적 형태로 변화됐다.

이러한 일제의 강압적 식민지 지배가 우리 시민사회의 형성에서 개인적, 집합적 주체의 정치·문화 경험과 제도화에 결코 작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일제 식민지 감시기구는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는 감시국가의 성격을 강화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자발적 조직화를 저지하는 동시에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포함해 민족해방운동을 극도로 탄압했다. 사상범 단속을 위한 특별고등계 경찰망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국가의 고도의 감시체제는 현실정치로부터 의도적으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반(反)정치주의를 확산시켰으며, 이는 현대적 개인의 정치적 자율성을 억압하여 시민사회의 성장을 지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서구사회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시민사회 형성의 문화적 지반이 현대적 개인의 정치적 자각과 참여의 증대에 있는 한 이러한 식민지 아래서의 경험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관찰되는 반정치주의 및 그와 연관된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가족주의 등과 같은 시민사회 심층구조의 역사적 기원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일제의 감시국가체제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청사에서 훙커우 공원으로, 훙커우 공원에서 숙소로 돌아오면서 바라본 상하이 풍경 속에서 다시 생각한 것은 바로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선조들의 삶과 식민지 시대가 우리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였다. 분명한 것은 역사에서 비약은 없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식민지 잔재들이 존재한다. 진정한 현대성의 성취는 바로 이런 식민지 잔재들을 완전히 극복할 때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교육을 포함해 다각적인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야 할 것이다.

‘동방명주 배를 타고’
숙소에서 잠시 쉰 다음 저녁을 먹으러 갔다. 중국 음식이 낯설지는 않지만, 서울에서 만나는 중국 음식과 다른 본토 음식은 새삼 이국적 정서를 느끼게 했다. 바람을 쐬러 가겠다는 일행을 뒤에 두고 혼자 숙소로 돌아오는 택시를 탔다. 푸둥(浦東) 지구를 잠시 구경하기 위해 황푸장(黃浦江) 옆 와이탄(外外灘)에 내렸다.

와이탄 지구에서 바라본 푸둥 지구의 야경.

지난 20세기 초부터 이곳 와이탄은 중국의 금융 중심을 이뤄 왔다. 황푸장 강변에 서니 건너편 푸둥 지구에 TV 수신탑인 둥팡밍주뎬스타(東方明珠電信塔)가 눈에 들어 왔다. 동방명주란 ‘동양의 진주’라는 의미다.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를 상징하는 푸둥 지구의 빌딩 숲 맨 앞에 놓인 동방명주탑을 보는 순간, 의미는 다르나 정태춘이 부른 ‘동방명주 배를 타고’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 곡은 2002년에 발표한 앨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에 실려 있는 곡이다.

“동방명주 대륙 가는 배가 반도를 떠나는구나
샛별 하늘 저 배는 황해 달빛 부서지는 바다로 나가다…
어여 가자 일엽편주야 단둥 항구에 들어가면
낯익은 여인네들 서울 가자고 기다린다”

노래에 나오는 ‘동방명주’는 인천과 단둥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 이름이다. 이 노래에는 서울로 돈 벌러 오는 조선족의 애달픈 사연이 담겨 있다. 돌아보면 조선족의 역사에도 식민지시대가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나라를 잃어 조국을 등져야만 했던 이들의 후예들이 바로 그 조국에 돈 벌러 오는 서글픈 역사를 생각하니 마음이 적잖이 착잡해졌다.

푸둥 지구의 야경과 동방명주탑을 보기 위해 강변에는 사람들이 넘쳐흘렀다. 친구들과 함께 나온 이들도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나온 이들도 있었다. 디지털카메라로 푸둥 지구를 배경 삼아 연신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었고, 중국인 특유의 활기찬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셔츠에 이내 땀이 밸 정도로 무더운 여름밤인데도 사람들의 표정은 더 없이 밝아 보였다.

2010 연중기획

동방명주탑이 바라보이는 와이탄에서 나는 한일병합 100년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 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시선을 돌리니 황푸장 저 끝에는 황해가 펼쳐 있었다. 밤이 아직 깊지 않았지만, 어서 숙소로 돌아가 정태춘이 부른 ‘동방명주 배를 타고’를 모처럼 듣고 싶어졌다.

<글·김호기 연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