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와 문화]싱글족도 인간관계가 중요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혼자 시장에 가면 반찬가게 아주머니들이 혀를 쯧쯧 차며 덤을 후하게 주기도 했다. 막 들어오기 시작한 대형 마트에 가면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남자 혼자 장을 보는 것 자체가 신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모습은 너무나 낯익은 풍경이 됐다. 우리 사회는 1990년대 이후 가부장제와 가족주의적 공동체에서 빠른 속도로 변모하고 있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한 장면.

성인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해 자기만의 삶을 시작하는 서구형으로 완벽하게 변모한 것은 아니지만 가족 해체나 평균 수명 연장, 직장 공간의 전방위적 이동으로 인해 혼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성인이 되고 혼기가 차면 당연히 결혼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전통주의적 가족 개념에서 우리가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1인 가구’는 1995년 164만 가구에서 지난해 338만 가구로 13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다. 이 가운데 독거노인·실업자·이혼가정 등 불안정한 독신가구를 제외한 20~40대 싱글족이 30%로, 1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약 5분의 1이 싱글족인 것이다. 따라서 정부에서도 소형주택 공급을 위한 건축법 완화 등을 통해 초미니 아파트가 많이 건설될 수 있도록 했다. 싱글족을 위한 전기밥솥이나 냉장고, 세탁기 등 소형 전자제품이 업계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싱글족을 겨냥한 상품과 서비스, 전용 주거 공간 등 ‘싱글산업’ 규모가 2004년 6조원(삼성경제연구소 추정)에서 올해 8조원 이상으로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폴 웨이츠 감독의 <어바웃 어 보이>는 결혼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독신 남성의 이야기다. 윌 프리먼(휴 그랜트)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평생 돈 걱정없이 편하게 놀고 먹을 수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전 세계에 울려 퍼지는 유명한 캐럴송을 만든 그의 아버지 덕분에 어마어마한 저작권료가 꼬박꼬박 프리먼의 통장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섬이다’라고 생각하는 프리먼은 구속당하지 않고, 개인주의적이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 친구들이 왜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12살 소년 마커스는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한 엄마를 도와 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조숙한 소년이다. 그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만 마커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고 자신의 우울증에만 관심이 있다. 프리먼은 자유로운 삶을 즐기면서도 여자를 만날 방법을 생각하다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에게 주목한다. 싱글남이면서도 신분을 위장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모임에 참석한 프리먼은 그곳에서 마커스의 어머니를 만난다. 프리먼은 마커스에게 멋진 남자가 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점차 프리먼의 가슴속에 마커스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한다.

시사와 문화

<어바웃 어 보이>는 가족제도를 거부하고 개인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독신 남자가 12살 소년을 만나 삶의 가치관이 변하는 이야기다.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다. 모든 인간은 섬이라고 생각하던 프리먼은 그 독립된 것처럼 보이는 섬들이 바다 밑에서는 서로 연결돼 있음을 깨닫는다. 싱글족 300만 가구 시대의 우리 사회에도 프리먼처럼 침범받지 않은 자유를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혼자 살면서 자신의 일과 취미생활을 행복하게 즐기는 싱글족이 늘어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아니라 이것을 가능케 하는 힘에 대한 정확한 이해다. 삶은 파편적으로 해체되고 있지만 이것들을 지탱해 주는 근본적인 힘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맺기이고, <어바웃 어 보이>는 함께 살아가는 세계의 한 모습을 보여 준다.

하재봉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