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공미술 ‘미디어 파사드’ 첫선

건축과 미술품, 조명 일체화한 예술… 서울스퀘어 20층 LED 전광판에 상영

시카고의 밀레니엄 파크.

서울의 서울 스퀘어.

지난 11월18일 오후 6시. 짧아진 겨울해 탓에 벌써 어둑어둑해진 서울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옛 대우센터)의 20층 높이 LED 전광판에 불이 켜졌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예정인 세계 최대 규모의 미디어 캔버스(가로 99×세로 78) 위로 영국 출신의 포스트 팝 아티스트 줄리언 오피의 영상작품이 상영됐다. 행인들의 경쾌한 걸음걸이를 표현한 이 작품은 서울스퀘어 소유주인 케이알원기업구조조정부동산투자회사가 가나아트센터에 의뢰해 제작한 ‘미디어 파사드’이다.

올해 상반기에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기도 한 오피는 동그란 머리에 개성적인 인체의 움직임을 담아낸 회화, 조각, 영상 작품으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고 있다. 뉴욕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 등 미술관뿐만 아니라 도쿄나 홍콩 거리에서도 그의 공공미술 작품을 쉽게 볼 수 있다.

전 세계 고층건물에 급속도로 확산

가나아트센터 실무진과 서울 스퀘어 작품 설치를 협의하는 작가 줄리언 오피(왼쪽).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파사드에는 오피의 작품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미디어 아티스트인 양만기씨(덕성여대 교수)의 작품이 교대로 설치된다. 양씨는 서울이 지닌 아름다움을 초현실주의적 영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서울의 풍경에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인 <우산을 쓴 사람>의 이미지를 중첩시켰다. 이 밖에 문경원, 류호열, 김신일, 이배경 등의 미디어아트 작품이 서울시의 경관 심의를 통과하는 대로 내년부터 1주일 단위로 매일 다른 영상을 야간에 하루 10~30분씩 상영할 예정이다.

영상미술과 결합한 미디어 파사드가 국내에 도입된 것은 서울스퀘어가 처음이다. 그러나 세계 대도시의 공공미술이 지향하는 새로운 방향인 데다 광화문 금호아시아나빌딩, 인천 송도신도시 국제업무단지 내 동북아트레이드타워 등에서도 준비 중이어서 조만간 우리에게도 친근해질 전망이다. 미디어 월, 미디어 캔버스, 미디어 스킨 등으로 불리는 이 장르는 미술품을 건축 요소의 일부로 이용하던 데서 벗어나 건축과 미술품, 조명이 일체화되는 경향을 뜻한다. 풀 컬러 LED 조명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전 세계의 고층건물에 급속도로 확대돼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도쿄의 샤넬 빌딩에 설치된 미디어 파사드.

미디어 파사드로 유명한 건물은 미국 시카고의 옥상공원인 밀레니엄 파크, 일본 도쿄의 샤넬 빌딩, 벨기에 브뤼셀의 덱시아 타워 등이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참여한 밀레니엄 파크는 벽돌 블록 형태의 LED 집적판을 쌓아 올려 다양한 빛과 얼굴을 벽 전면부에 연출하고 입에서는 물줄기가 쏟아지는 미디어 벽 분수가 설치됐다. 도쿄의 중심지 긴자에 들어선 샤넬 빌딩 역시 독특하고 창조적인 미디어 파사드로 브랜드 홍보 효과를 톡톡히 거두고 있다. 브뤼셀의 덱시아 타워는 38층짜리 건물 전면을 덮은 15만개의 LED에서 인터랙티브 아트를 비롯해 시간과 날씨 정보를 다양한 컬러와 기하학적 패턴으로 제공한다.

기존의 공공미술이 더 발전된 개념
미디어 파사드의 초기 형태는 조명디자인과 결합한 것이다. 영국 런던의 O2 아레나 스터디움, 2006 독일월드컵대회 경기장이던 베를린의 알리안츠 아레나, 2008 베이징올림픽 당시 세계의 주목을 끈 냐오차오와 워터큐브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국내에서도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이 조명 위주의 미디어 파사드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파사드는 가나아트센터 부설 문화환경연구소가 1년에 걸쳐 준비해 왔다. 외벽의 LED 전광판 설치에 30억원, 미디어 파사드에 설치될 영상물과 로비·선큰가든 등의 장식용 작품 구입비 30억원이 들어갔다.

브뤼셀의 덱시아 타워.

프로젝트 책임자인 배원욱 차장은 “서울역과 옛 대우센터가 상징하는 한국의 역동적 근대화 과정에 주목하는 동시에 동북아 비즈니스의 중심으로 거듭나기 위한 미래지향적 가치를 결합시켜 ‘장엄한 중심’이란 주제로 작품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미디어 파사드는 기존의 공공미술이 더욱 발전된 개념이란 평가를 받는다. 2000년대 들어 대기업 본사, 백화점 등을 위주로 한 기업들의 미술품 투자가 크게 늘어났으나 이는 직원이나 입주사·고객 등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2007년에 리모델링하면서 400억원어치의 미술품 컬렉션을 선보인 신세계백화점 본관을 비롯해 삼성그룹 본관, 하나은행 본점, 흥국생명 본사 등이 유명하다. 그런데 미디어 파사드는 기업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공성이 더욱 강화됐다.

서울시의 디자인 중시정책에 힘입어 이 같은 형태의 새로운 공공미술은 점차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디자인올림픽, 빛의 축제,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등 대형 행사를 개최하는 한편 디자인 개선, 도시갤러리, 경관조명 등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2008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는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미술의 한 방식이란 점에서 환영한다”면서 “대형작품도 좋지만 관공서, 기업 등에서 소규모의 미디어 파사드를 운영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사진제공·가나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