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아리랑]조선부녀총동맹 부위원장 정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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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여성들 ‘말을 알아듣는 꽃’

1927년 유영준, 주세죽, 정칠성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근우회의 활동 모습. 근우회는 항일운동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애쓴 단체다. <청년사 제공>


“11월혁명 기념일을 이렇게 초라하게 맞는 것은 정말 쓸쓸합니다. ‘짜르’왕조의 철쇄를 끊은 이 빛나는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당시 러시아 여성들이 바친 피와 노력은 참으로 위대하였지요. 우리도 그 무섭고 악착한 지하운동시대에도 이날이 닥쳐오면 어떻게 하던지 동무들끼리 서로 만나서 축하하고 힘을 얻고 하던 것이었는데 해방이 되었다는 이 땅에서도 옛날과 똑같은 마음으로밖엔 이날을 맞이할 수밖엔 없군요.”

찾아간 날이 11월혁명 기념일이라 여사는 세련된 경상도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주 웃는 얼굴이나 이마에 감출 수 없는 주름살은 한없이 험한 풍상을 이야기하는 낡은 나무같이 그러나 튼튼하고 어디까지나 미루나무같이 외로우면서도 자신 있는 인상을 준다.

“북조선에서는 성대하게 이날을 기념할 겁니다. 필수과업의 한 가지로 남녀동등권 법안이 실시된 거기서는 몇천 년을 두고 잃어버렸던 여성들의 권리를 도로 찾을 수가 있잖았어요! 그런데 이 남조선에선 이게 무슨 모양이요. 근로대중은 모조리 도탄에 빠지고 민주진영은 결정적 탄압을 받고 그중에도 이중삼중으로 억눌리고 질식하는 여성들의 운명은 언제까지든지 기구만 하구려. 정치적 압력은 우리들의 직접적인 투쟁대상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은 더욱 절박한 고통을 주는 건 조선의 남편들이에요. 소위 민주진영의 일꾼들까지 가정 내의 민주주의는 영 모르고 안해를 계몽하지 않고 독서나 집회를 위해서 시간을 주지 않고 이러고는 여성운동이 활발하지 못한 것만 개탄하잖아요.”
기자도 민망스럽게 웃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모두들 주의하세요.”
여사도 웃었다. 부총 부위원장인 여사가 얼마나 바쁠 것을 짐작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독립신보> 1946년 11월 14일치. 그러니까 유영준 조선부녀총동맹 위원장 다음날 한 부위원장 정칠성 인터뷰 기사이다. 제목은 ‘조선의 남편들이여, 여성 계몽에 힘쓰는가?’
정칠성(丁七星, 1908~?)은 경북 대구(大邱)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서울로 올라와서 한남권번(漢南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금죽(錦竹)이 기생 이름이다. 아무리 평등과 자유가 넘쳐나던 해방 직후라고 하더라도 기생 출신으로 여성운동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봉건유제 타파하여 여남평등 이룩하자!”고 부르짖던 진보적 정당이라지만 그때는 여전히 기생을 팔반천인의 하나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비판>이라는 잡지 1938년 4월호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가두풍경’이라는 단신·가십란인데, ‘정칠성 여사의 대희열’이라는 제목이다.

기생 출신이 여성운동지도자로

정칠성 <푸른역사 제공>

‘정칠성 여사도 그의 애자(愛子)가 동경에서 유학하는 중인데 학자가 없어서 각 방면으로 애쓰던 중 대동광업회사에서 학비를 보조하여 주기로 되었으므로 “기생노릇을 할까” 하던 결심을 집어던지고 기뻐한다고.’

‘권번’은 왜말이다. 전통적 방법으로 엄혹한 수련기를 거친 다음에야 한량 술상 앞에 나갈 수 있던 기생사회 또한 일제 강점과 함께 ‘기생조합’이라는 것이 생겨났는데, 이 ‘기생조합’이 ‘권번’이라는 왜식 이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한남권번’은 이름 그대로 한수 이남에서 올라온 가난한 농군 집 여자아이들이 모여 기생수업을 받던 곳이니, 정칠성 또한 애옥살이 출신이리라는 짐작이 간다.

그러나 대단히 의지가 강하고 품은 꿈이 컸던 듯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영어강습소에서 영어공부를 한 것이 1922년 15살 때이니, 놀랍게 당찬 소녀가 아닐 수 없다. 다음해 귀국하여 물산장려운동에 들었고, 1월 이춘수(李春壽)와 대구여자청년회 창립을 채잡아 집행위원이 되었다. 24년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이 되었고, 25년 3월에는 경북지역에서 일어난 사상단체 ‘사합동맹(四合同盟)’에 들었다. 같은 달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여자기예학교에 입학했고, 여성사상단체 ‘삼월회(三月會)’에 들어갔다. 26년 1월 삼월회 간부 자격으로 <조선일보>에 ‘신여성이란 무엇?’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강렬한 계급의식을 지닌 무산여성만이 모든 불합리한 환경을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진정한 신여성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27년 5월 ‘근우회’ 결성에 들어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31년에는 ‘신간회’ 중앙위원이 된 다음 경성·평양·대구·통영에서 편물 강습 따위로 살아갔다. 일제 탄압이 극심하여지는 30년대부터 모든 사회주의 운동권이 지하로 숨어들어 숨을 죽이게 되는데, 정칠성 또한 바짝 몸을 낮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짧은 소감을 쓴 것이 있는데, <조선지광> 1931년 정월호에 실린 ‘연애의 고민상과 그 대책’이다.

동경영어강습소에서 영어공부
연애로 인한 고민상은 혹은 각 나라의 특수한 사정과 각 시대의 변천을 따라서 그 정도와 건수의 차이점은 있다 할망정 영원히 없지 못할 난제라고 나는 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남녀가 대등한 지위에서 그들이 자유로 결합할 수 있는 시대라 할지라도 원시난혼제를 실시하지 않는 한에는 이성과 이성이 접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따라서 연애의 고민은 의연히 있을 것이란 말이외다.

그러나 연애고민을 대량생산하여 인간에게 적지않은 불행을 초래케 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사회라 할 것이외다. 그렇다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으니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순결하고 진실하여야 할 애정 그것까지도 물질적 이해로 타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외다. 따라서 그런 연애는 불미한 결과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속담에 연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요마는 현대와 같은 계급사회에있어서는 연애에 있어서도 그것을 초월하게 되지 못합니다. 하기야 연애 자체의 원리원칙으로만 하면 동일한 인간인 이상 누구나 연애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현대와 여(如)한 과도기에 있어서는 피차간 진실한 연애는 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남존여비의 봉건사상과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모든 권한이 있는 이상 연애에 있어서도 여자는 자연히 불평등한 지위에 서게 됩니다. 위선 정초관부터 남자가 다르게 되어서 남자는 제맘대로 성적 방종을 하면서도 여자에게는 편무적으로 정조를 강제하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혹은 남녀는 원래 생리적으로 다른 까닭에 모성을 가진 여자 편은 그 여자의 혈통을 밝힐 필요상 정조를 지켜야 하겠다 하지마는 그것은 전혀 남성의 성적 방종을 옹호하려는 한갓 구실에 불과한 줄 압니다. 만일 그들의 연애가 진실하다 할 것 같으면 결코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성의 관계란 복잡하니만큼 남녀가 절대 평등한 지위에 서 있다 할지라도 연애의 고민은 언제나 다소간 있을 줄 압니다. 예를 들면 삼각관계라든지 경제적 관계라든지 사상적으로나 감정적인 허다한 원인에서 - 그러나 그중 큰 원인은 사회제도에 있다고 볼 것이니 연애의 고민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남녀간 사회적 지위가 균등되고 또한 전 인류가 보다 행복한 지상낙원 시대가 돌아오지 않으면 안될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진화의 구원한 장래에서나 바랄 것인즉 현하 정세 밑에서는 동지연애로서나 만족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연애를 위한다는 것보다도 어떤 사업을 위한 결합으로서나- 다시 말하면 장래 인류 사회에서의 완전한 연애를 이룰 터전을 닦기 위해서 현재의 불합리한 환경과 투쟁하는 결합으로서나… 황망 중 좀더 구체적으로 쓰지 못하고 이만 그치겠습니다.

아들 이동수는 박헌영의 보디가드
정칠성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8·15를 맞으면서였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건설에 들어 부녀부장이 되었고, 10월에는 서울로 올라와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위원이 됐다. 1947년 미군정을 등에 업은 극우세력이 조작한 이른바 ‘8·15폭동 음모사건’에 걸린 정칠성은 다시 지하로 내려가게 된다.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된 17명 가운데 여성은 김명시와 단 둘이다.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선전부장이던 김명시는 이때부터 자취를 알 수 없고, 정칠성은 북으로 올라간다.

숨막히게 조여오는 압박이었다. 몽양(夢陽)이 흉탄에 쓰러졌고 당 살림을 맡았던 이관술은 해를 넘겨 대전형무소에 갖혀 있었다. ‘경성트로이카’ 시절부터 백절불굴로 싸워온 이현상·권오직·이강국·김삼룡·이주하는 다시 지하로 들어갔는데, 이른바 좌익서적을 압수한답시고 괴테의 <파우스트>며 자본주의 이론의 시조인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까지 뒤져 빼앗아 가는 형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숨막히는 것은 조선혁명의 심장인 박헌영에게 내려진 체포령이었다. 조선공산당 3대 이론가의 하나인 이우적(李友狄)과 사촌 동서 사이인 <해방일보> 기자였던 박갑동 증언이다.

“뒤에 들은 말이지만 박헌영은 이날(9월 5일) 한 평 반 남짓한 영구차 속 자기 키보다 조금 큰 관 속에 반듯이 누워 시체를 가장해서 월북했다는 것이다. 38선 접경에 이를 때까지 혹시나 경찰의 검문을 염려해서 가족으로 분장한 남녀 당원 몇몇이 흡사 경기도 일원의 어느 선산에 매장이나 하러 가는 듯한 장례차림을 꾸민 것이다. 그때 영구차 뒤에 따르던 호상차에 두건을 푹 눌러쓴 박헌영의 보디가드 이동수(李東樹)의 얼굴을 눈여겨 보지 않았더라면 이 장의 행렬이 박헌영의 ‘서울탈출행’이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 행렬에 뽑힌 5명의 호위원은 공산당 내에서 엄선된 일당백의 행동대원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박헌영의 보디가드 이동수’가 바로 정칠성 아들이다. 기생노릇을 다시 해서라도 공부시키려 했던 그 동경 유학생이다. 그 아버지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정칠성이 고려공청 중앙총국 책임비서였던 신철(辛鐵, 1901~?) 부인이었다는 적바림이 있는데, 이동수는 누구 아들인가? 그리고 그 다음 이어졌을 삶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다. 모자가 함께 갔는지 따로 갔는지도 알 수 없다.

정칠성은 48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같은 해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이 되었다. 55년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후보, 57년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평북 대의원을 지냈다. 알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57년까지 요직을 맡고 있었다면 저 피비린내 나는 남로당계열 숙청바람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칠성은 해어화(解語花)였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니, ‘기생’을 일컫는 말이다. 해어화 출신으로 여성해방을 위하여 싸웠던 정칠성이 살았다면 올해 꼭 102살이 된다.

<김성동>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본지를 통해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 훨씬 감동적인 필체로 현대사에서 사라진 인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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