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근현대사 논란 교과서 역사 흔들다

금성출판사 교과부 요구에 독단 수정… 집필자 동의 없어 법적 분쟁 예상

11월 10일 서울시 교육청이 일선 고등학교장을 대상으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선정과 관련한 연수를 실시해 논란을 빚었다. 이날 공정택 교육감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50년이 넘는 대한민국 교과서 역사에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금성출판사가 집필자와 협의하지 않고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교육과학기술부의 수정 지시대로 고친 것. 금성출판사는 교과부로부터 수정 지시를 받은 24건의 항목을 고쳤고, 다른 출판사도 교과부의 직권 수정 지시를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교과부 박중재 홍보담당관은 “12월 둘째 주에 승인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금성출판사 김인호 대표는 12월 2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문제로 더 이상 교과서 논란이 지속되면 회사 경영이 정말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까지 될 것 같아서 이 사안을 빨리 종결지을 수밖에 없다”면서 출판사 독자적으로 수정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수순대로 출판사가 독단적으로 수정했다.

“저작권 침해이자 명예 훼손 행위”
이 사실이 알려지자 역사학자 및 역사교과서 저자 들이 강력히 반발해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 집필자인 김한종 교수(한국교원대)·홍순권 교수(동아대)·김태웅 교수(서울대) 등과 전국역사교사모임, 한국역사교육학회 등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청와대가 출판사에 압력을 가해 교과서를 수정했다”면서 “청와대와 교과부는 집필자와 출판사에 대한 부당한 압력을 즉각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이번 사태가 심각한 것은 교과부의 수정 요구를 출판사가 집필자와 협의 없이 독단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해마다 교과부는 달라진 용어나 정세에 따라서 수정해야 할 내용을 출판사와 집필자에게 통보했다. 그러면 출판사와 집필자는 협의를 거쳐 수정해야 할 내용은 수정하고, 수정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수정하지 않았다. 교과부는 관례처럼 수정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김한종 교수는 이번 사태에 대해 “집필자의 동의 없이 내용을 수정하면, 자신이 쓰지 않은 내용이 쓴 것처럼 기록된다”면서 “이는 저자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행위이자,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교과서 집필 교수들은 이번 사태를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집필자들이 취할 수 있는 법적 대응은 크게 저작권 침해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사과조치, 위자료 청구 및 발행 금지 가처분신청 등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저작권을 상담하고 있는 세명대 김기태 교수(미디어창작학과)는 “교과서를 저작물이라고 전제하면 집필자들은 저작 인격권이 있는데, 자신의 저작물을 원형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 동일성유지권이 포함된다”면서 “집필자들은 출판사가 이 권리를 침해했다고 법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집필자들이 부담을 느끼는 법적 대응은 ‘발행 금지 가처분신청’이다.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내년 3월까지 교과서가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가 학생이 될 수 있다. 김 교수는 “이런 우려 때문에 가처분 신청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11월 4일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저자들이 교과부의 역사교과서 수정 권고를 거부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경향신문>

집필 교수가 법적 대응을 했을 경우 출판사가 대상이 될 것이고, 외압 여부에 따라 교과부의 책임도 따질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령인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 제26조와 제27조는 교과서의 수정 및 개편에 관한 사항을 담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은 교과용도서의 내용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때에는 국정도서의 경우에는 이를 수정하고, 검정도서의 경우에는 저작자 또는 발행자에게 수정을 명할 수 있다”. 즉 수정의 이유가 적법한지 법정에서 다뤄질 것이다.

이에 대해 금성교과서 담당자는 “대표가 이미 인터뷰를 통해 밝혔기 때문에 달리 할말이 없다”면서 “집필자들은 이미 반대했기 때문에 출판사가 집필자에게 내놓을 다른 카드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근·현대사>를 발행하고 있는 한 출판사의 담당자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 “교과부의 수정 요구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강제적으로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냐”면서 “저작권은 저자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법적인 다툼이 생길 것”이라고 진단했다.

교과서 인쇄 배포에도 차질 불가피
이번 사태로 인해 교과서 인쇄가 원활하게 될 것이냐는 점도 의문이다.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 제30조에 따르면 “학교장은 1학기에 사용될 교과용도서는 당해 학기 개시 6개월 전까지, 2학기에 사용될 교과용도서는 당해 학기 개시 4개월 전까지 교과용도서의 발행자 또는 그 대리인에게 주문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내년 1학기에 사용할 교과서의 주문은 지난 9월까지 마감했어야 한다. 즉 규정과 어긋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현재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과서의 주문이 완료됐고, 인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단 실업계 학교의 <세무회계> 등의 일부 교과서는 매년 법률이 바뀌기 때문에 매년 1월 인쇄한다.

(사)한국검정교과서의 관계자는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는데, 12월 중에만 주문하면 배포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며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35만 부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정도 분량이면 주문 후 10일이면 인쇄가 끝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서울 지역 금성출판사 교과서 채택률은 2008년 51%였지만, 이번 사태로 2009년에는 30%대로 낮아질 전망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이인제 수석연구위원은 “안타까운 것은 학자나 대책위 사람들이 정확한 상황이나 교육적인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한종 교수는 “교과서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도서지, 이념 논쟁의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면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은 지극히 비민주적이면서, 교사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해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의 윤종배 회장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2010년까지만 사용하고 2011년부터는 세계사를 더한 <역사> 교과서에 포함된다”면서 “이번에 수정된 내용이 거의 변하지 않고 <역사> 교과서에 실리게 되는 것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논란은 결국 교과서의 역사에 새로운 논쟁거리를 던져준 셈이다. 국정교과서, 검정교과서, 인정교과서로 구분되는 현재의 교과서 체계는 제1차 교육과정기(1955~1963년)에 만들어졌다. 국정교과서는 교과부가 직접 편찬하는 교과서로 저작권을 교육과학기술부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검정교과서와 인정교과서는 저작권이 집필자에게 있다. 흔히 검·인정 교과서라고 불리는 것은 교과서의 지위에 관한 사항으로 교과부나 시교육감이 심사해서 교과서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